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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박한 민낯 드러낸 한국 불교… 갈 길을 묻다

입력 : 2018-09-11 21:27:05 수정 : 2018-09-11 21: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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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본래 가르침 도외시한 채/교단 파행·승려들 비리 외면하고/지나치게 세속에 치우친 길 걸어
근간 ‘이야기 한국불교사’ 서문에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불교를 향한 비판은 매섭다. “이 땅에 수용된 이래 불교는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지나치게 세속의 길을 걸어 때로는 시대정신을 외면하거나 천박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의 수용부터 지금까지를 시간순으로 엮은 이 책에서 그는 그간의 한국불교사가 “승려와 교단의 비리나 파행에 대해서는 애써 기술하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원로학자의 바짝 날이 선 일갈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건 불교 최대 종파인 조계종의 볼썽사나운 최근의 분란 때문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불교는 어느 모로 보나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으나 그만큼 부패했고, 큰 지탄을 받았으며 어렵게 타개책을 모색했다. 불교계의 혼란이 극심하고, 이를 보는 대중의 시선이 차가운 이즈음이 당시를 반면교사 삼아야 할 때다. 혼란을 극복하고, 잘못을 바로잡을 지혜 또한 그 속에 있을지 모른다.


◆늘어난 재물에 무위도식하는 승려들

‘왕이 곧 부처’라는 것은 왕을 비롯한 신라의 집권층이 백성들을 향해 줄기차게 내놓는 메시지였다. 국가통합의 이데올로기였고, 왕권 강화를 위한 선전 구호이기도 했다. 부처를 자처한 왕과 그 주변의 귀족들은 부처 흉내라도 낼 양으로 사찰에 재물을 보시했다. 재물이 쌓이니 사람도 몰려들어 큰 절에는 수천 명, 작은 절에는 수백 명의 승려가 거주했다. 문제는 이들 중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무위도식하는 무리”로 “손발 하나 까딱하지 않는 신흥 귀족”에 다름없었다는 점이다.

종파 간 분쟁과 갈등도 도를 더해갔다. 너는 그르고, 나는 옳다는 입씨름을 벌였고, 재산을 두고 끊임없이 분쟁을 벌였다. 승려들이 국내파와 유학파로 갈려 힘겨루기를 한 것도 혼란의 한 양상이었다.

오늘날 조계종의 개조(開祖)로 추앙받는 도의는 신라말 불교의 이 같은 혼란 속에서 등장했다.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821년 귀국한 그는 무위법(無爲法)을 설파했으나 호응이 없자 설악산으로 들어가 선풍을 일으키며 제자를 모았고, 불교개혁을 주도했다. 이런 흐름을 이어받은 혜소는 제자들과 공동노동을 하면서 해진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정진했다. 무염은 귀족 출신이었으나 찾아오는 사람들의 귀천을 따지지 않았고, 재물을 왕실이나 귀족들에게서 받지 않았다. 

대구 동화사의 보조국사 지눌 진영. 지눌은 부처란 마음이며 인간은 평등하다는 교리를 내세워 당대에 큰스님으로 추앙받았다.
◆산천을 경계로 한 대토지 소유자 사찰

고려 중기의 불교 역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단적인 면이 사찰의 왕성한 상업활동과 경제력이었다. 부유한 절에서는 “베나 곡식 따위를 가지고 장리 놀이를 하며 각 고을에 관리인을 보내 해마다 이자를 거두어들였다”고 한다. 사찰이 소유한 토지 역시 막대했다. 사원전은 임금이 내린 땅, 신도가 시주한 땅, 절에서 개간한 땅이 중심이었는데, 11세기에는 사찰에서 직접 사들인 땅이 크게 늘었다.

각 사찰은 소유 토지에 장생표를 세웠다. 땅의 경계를 표시한 것이다. 경남 양산에 가면 통도사에서 1085년에 세운 장생표가 있다. 금강산 장안사는 경기도와 전라도, 황해도 등지에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사원전에는 국가에서 조세를 물지 않아 귀족들의 재산도피처로 활용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12세기에 이르러 진짜 사원전과 위장 분산된 사원전은 산천을 경계로 하는 대토지를 점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강원도 양양의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도의선사는 신라 불교의 타락에 맞서 불교개혁을 주도한 고승이었다.
지눌은 이런 상황을 개탄하며 1182년 개성 보제사에서 열린 법회에서 “예불과 경전 공부를 하면서 직접 노동을 하여 각각 맡은 바를 이룩해가자”고 주장했다. 권력자에 빌붙어 후원을 받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자는 취지였다. 지눌은 송광산 길상사에 내려가 제자들과 함께 농사를 지었고 자급자족의 생활을 했다. 이는 신라 말기 개혁 승려들의 수행 방법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었다.

부처에게 복을 빌며 재물을 시주하면 소원을 성취시켜준다고 떠들어 재산을 불린 주류 불교에 대해서는 “부처란 마음”이며 인간은 평등하다는 이론을 제시하며 비판했다. 그는 “(불성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마음을 잘 닦으면 누구나 불성을 갖출 수 있고 극락에도 갈 수 있다”며 “이것이 너희 몸 안에 있는데 스스로 자각하지 못할 뿐”이라고 가르쳤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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