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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키, 날 때부터 결정되나 유전자 결정론의 허실 추적

입력 : 2018-08-18 03:00:00 수정 : 2018-08-17 20:5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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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남성 신장, 美 보다 8㎝ 더 커 / 19C 후반엔 평균 165㎝ 불과… 8㎝ 작아 / 당시 경제 불황으로 못먹어 성장 못해 / 경제 나아지며 식생활 개선돼 키 쑥쑥 / 같은 집단 개인간 키 차이 유전 영향 / 집단 간의 차이는 문화적 영향 더 커 / "틀정 형질, 타고난 DNA가 결정" / 단선적·편향된 사고 경계해야
스티븐 하이네 지음/이가영 옮김/시그마북스/1만8000원
유전자는 우리를 어디까지 결정할 수 있나/스티븐 하이네 지음/이가영 옮김/시그마북스/1만8000원


‘붉은 꽃이 필지 흰 꽃이 필지를 결정하는 유전자는 따로 정해져 있다.’

19세기 그레고어 멘델의 완두콩 유전자 실험에서 나온 도식이다. 키가 클지, 작을지를 결정하는 유전자가 따로 있고, 우울증에 걸리게 하는 유전자도 따로 있다는 것. 종래 멘델의 학설은 지금도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한 가지 특징에 한 가지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식의 인식을 갖도록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아내에게 ‘바람 유전자’가 있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어느 남자가 가만 있을까. 근거없는 낭설인데도 말이다.

오늘날 네덜란드 남자의 평균 신장은 185㎝로 가장 크다. 미국 남성보다 8㎝나 더 크다. 네덜란드인은 과연 미국인보다 우세한 키 유전자를 가졌는가. 십중팔구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19세기 후반 네덜란드 남성의 평균 신장은 165㎝였다. 173㎝였던 미국 남성보다 8㎝나 작았다. 왜 네덜란드인들의 키가 갑자기 커졌을까. 이는 생활 환경이나 습관 등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세계 3위였던 반면 네덜란드는 기나긴 경제 불황을 겪고 있었다. 네덜란드인의 평균 신장이 미국인에 크게 뒤졌던 이유다. 이후 네덜란드 경제가 회복되면서 식생활이 개선되고 키도 따라서 커졌다. 오늘날 네덜란드인의 평균 신장이 세계 정상에 오른 건 세계 1, 2위를 다투는 네덜란드인의 우유 섭취량과 관련이 있다. 우유는 키와 강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 일본의 경우 전후 국가 차원의 우유 급식 프로그램을 운영한 덕분에 몇 십 년 사이 평균 신장이 10㎝나 커졌다. 정체된 미국인의 키는 무엇 때문인가. 미국인들은 패스트푸드를 즐기는 식습관 때문에 키보다는 허리둘레가 커졌다고 한다. 저자는 “같은 집단 내 개인 간의 키 차이는 유전적 영향을 받지만, 집단 간의 키 차이는 문화적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고 설명한다. 키를 결정하는 지배적인 유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근 연구를 통해 키에 연관된 유전자는 29만4831개나 발견되었다.

키 차이는 유전자와 형질(표현형) 간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드러낸다. 멘델의 완두콩처럼 특정 형질이 단일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헌팅턴병이나 낭포성 섬유증 같은 희소병은 유전자 예측력이 100%에 가깝고 유방암도 유전자와 관련성이 높은 편이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스티븐 하이네 교수는 우월한 DNA는 날 때부터 정해졌다는 그릇된 지식에 현혹되지 말 것을 촉구하며, 엄마와 아기의 관계 등 상호 관계망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형질은 키처럼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복잡한 상호 관계망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유전자 자체가 아니라 형질(표현형)인데 여기엔 문화적 요소가 크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캐나다의 명문 브리티시컬럼비아대 문화심리학 교수 스티븐 하이네가 쓴 이 책은 유전자 결정론의 허실을 고발한다. 현대인의 편향적 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아울러 개인 간의 형질의 차이를 유전자 탓으로 돌리는 세태를 분석하고 그 허실을 고발한다. 태아의 DNA 염기서열을 분석해 하자가 발견된 태아를 제거하거나 ‘맞춤 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20세기 초엽 꽃을 피운 이 같은 인간 유전학 연구는 우생학과 연결돼 있었다. 나치 만행과 홀로코스트 이후 우생학에 대한 연구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최근 들어 유전학 연구는 바람직하지 않은 우생학적 용도로 활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저자는 결론에서 “무슨 무슨 유전자가 따로 있다는 식의 설명은 인간의 편향적 사고에서 비롯됐다”고 적었다. 키는 유전자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편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저자는 “사람들은 문화적 요소를 배제한 채 유전자의 영향력만 강조하는 유전학의 과장광고에 속기 쉽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또한 특정 형질이 특정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 단선적 사고의 오류를 지적하며 이를 ‘스위치 사고’라고 명명한다.

저자는 20세기 전반기 무분별한 유전자 결정론이 우생학과 반인륜적 인종주의를 낳았던 흑역사를 상기시키면서 경종을 울린다. TV프로그램에서 흔히 볼 수 있듯 ‘유전자가 다르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은 현대 지식인이라면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생명공학 관련 업체들의 과장된 허위 광고에 속지 말 것을 주문한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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