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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삶, 나의길] 15년째 北 인권운동 하는 이방인… “통일 땐 평양 가서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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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8-19 10:23:49 수정 : 2018-10-11 1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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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전공·한국대사관 근무/ 외교관 대신 활동가의 길 택해 / 北인권문제 국제회의 번역 계기 / 운명처럼 한국으로 터전 옮겨 / 어린시절 공산주의 경험 생생 / 이웃·학교에서 감시 받고 살아 / 탈북자들이 겪는 공포에 공감 / 인권침해, 기록으로 남겨둘 것 / 한국, 정치 이슈에 활용 '씁쓸' / 유명인들, 국제 구호활동 활발 / 비판 우려해 北 인권엔 소극적 /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 맞나요?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 문제가 다뤄질 때마다 국제회의장 안팎을 누비는 활동가가 있다. 푸른 눈의 이방인이지만 벌써 15년째 북한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요안나 호사냑 북한인권시민연합 부국장이 그 주인공이다. 조국 폴란드를 떠나 서울에 온 지 어느새 14년이 흘렀다. 그 사이 남북한 사이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그가 속한 단체는 지난 5월 미국 민주주의진흥재단(NED)이 주최한 ‘2018 민주주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최근 급변하고 있는 남북관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궁금했다. 지난달 31일 서울 서대문구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실에서 호사냑 부국장을 만났다.

요안나 호사냑 부국장이 지난달 31일 서울 서대문구 북한인권시민연합 사무실에서 지난 15년간의 북한 인권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허정호 선임기자
호사냑 부국장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살아본 경험으로 외부에 개방되는 시기에 내부적으로는 굉장한 압박을 한다”며 “현재 북한 사람들의 인권실태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걱정부터 털어놨다. 그는 “폴란드 정부도 그랬지만 지금 발생하는 인권 침해는 나중에 가서 개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지금 적극적으로 요청하지 않으면 누군가 동시대에 계속 고통받게 되는 시급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그는 폴란드 바르샤바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했다. 원래 북한어문학과로 개설됐다가 1989년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폴란드가 한국과 정식 수교를 맺으면서 한국어문학과로 이름이 바뀌었다. 졸업 후 바르샤바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4년간 일했던 그는 외교관 대신 활동가의 길을 택했다. 2003년 헬싱키인권재단에서 일하며 북한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계기다. 이후 한국으로 건너와 북한인권시민연합과 본격적으로 일하게 됐다. 박사 과정을 공부하며 북한 인권활동에 매진했다. “2004년에 북한인권시민연합이 바르샤바에서 제5회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를 개최했는데 그때 번역과 행사 준비를 도운 일을 계기로 한국까지 오게 됐다”며 “이 모든 일은 운명처럼 연결됐다”고 말했다.
2013년 10월2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서울시 명예시민 행사에서 요안나 호사냑 북한인권시민연합 부국장이 박원순 서울시장으로부터 명예서울시민증을 받고 있다.
요안나 호사냑 제공

공산주의 사회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그는 북한 문제가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한다. 호사냑 부국장은 “탈북자들이 겪은 공포를 나는 직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며 “어린 시절 폴란드에서는 학교나 이웃사람을 통해 감시받고 살았다. 부모님은 항상 밖에서는 집에서의 일을 말하면 안 된다는 당부를 들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가 공장의 책임자였는데 해당 부서에서 비밀 방송이나 금서 등을 보다가 적발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우리 집으로 경찰이 찾아왔고 어린 나는 방구석으로 숨어야 했다”고 당시를 설명했다.

학창시절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진실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고 고민에 떨었던 14살 소녀의 기억은 아직도 그의 뇌리에 깊게 새겨져 있다. “선생님과 1대1로 묻고 답하는 역사 시험시간이었다. 1939년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했고 뒤이어 소련이 폴란드로 들어왔다. 실은 그때 수많은 사람이 학살당했고 아직도 그 숫자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학교에서는 소련이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들어온 것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답해야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너는 이게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라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며 “14살 꼬마였던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집에서 몰래 듣고 본 것이 있어 진실은 알고 있었지만 안다고 말하면 우리 가족이 모두 끌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진실을 안다고 답했다. 선생님은 조용히 ‘그러면 됐다’고 하고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학생들에게 거짓말을 가르쳤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던 것 같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2013년 6월17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2회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에서 당시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가운데)와 요안나 호사냑 북한인권시민연합 부국장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호사냑 부국장은 북한인권 실상을 해외로 알리는 일을 주로 해왔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보고서나 국제회의를 통해 북한 인권 실상을 폭로했고, 서울에 설치된 유엔 북한인권사무소(서울 유엔인권사무소) 설립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2004년 처음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이 임명되던 때 결의안 채택에도 그의 공로가 있다. 현재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이 한국에 오면 빼놓지 않고 만나는 인사 가운데 한 명이다. 하지만 국제캠페인 활동 외에도 직접 한국에 들어온 탈북자를 지원하는 활동에도 열성으로 임했다. 특히 탈북청소년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의 리더십 교육 등에도 힘을 쏟았다. 지난해에는 폴란드의 과거사 문제를 담은 현장을 탈북 대학생들과 함께 다녀오기도 했다.

“작년에 탈북 대학생들과 함께 폴란드 국가기억원(폴란드 민족에 대한 범죄기소위원회)을 다녀왔다”며 “이후에 한 학생은 자신도 지금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기록하고 향후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고 전했다. 그는 탈북 대학생들이 성장해가고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리 잡는 모습을 볼 때마다 대견하다고 했다.

그는 북한인권 활동을 하며 많은 협박에도 시달렸다. “폴란드 집으로 북한 대사관이라는 곳에서 전화가 와 평양으로 초대한다는 이야기를 부모님께 했다. 어떤 배경인지는 모르지만 우회적인 협박으로 들렸다. 공산주의 사회서 살아본 부모님은 많은 걱정을 하셨다. 국제회의나 캠페인 때마다 북한 측 인사들이 와 우리 얼굴 바로 앞까지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고 녹음하는 일은 예사다. 작년 탈북 대학생들과 함께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견학 갔을 때는 누구에게도 일정을 알리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북한 측 기관원들이 나와 우리를 따라다녔다. 한 탈북 대학생은 무서워 울음을 터뜨렸다. 내가 폴란드 관계자에 알리고 북한 요원들의 사진을 찍자 그제야 멀찍이 떨어졌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호사냑 부국장은 한국에서 북한 인권 문제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 문제 자체보다 정치적 이슈에 자주 활용된다는 점이 안타깝다고 했다. “인권은 북한이든 아프리카든 세계 보편적인 기준이고 권리인데 한국에서는 유독 자신의 정치적 입지, 정부의 입장에 따라 침묵하기도, 활용하기도 하는 세태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탈북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말했다. “탈북자들 가운데는 수용소에 갔던 사람이나 성폭력 피해자 등 심리적으로 힘들어하고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많다”며 “실태조사를 위해 만나보면 이웃 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상태다. 이런 작은 통일도 이루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북통일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셀러브리티(유명인사)들은 아프리카나 국제난민 활동에는 많이 나서는데 정작 가까운 탈북자나 북한 인권 문제에는 소극적이다”며 “자칫하면 정치적 비판을 받기 때문인데 이런 사회가 과연 건강한 민주주의 사회인지 의구심이 든다”고 했다.

만약 통일이 되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평양에 가서 북한 인권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그곳 사람들의 인권의식이 낮기 때문에 경찰이나 검찰, 의사나 간호사, 공무원, 언론인 등을 상대로 인권 교육을 하고 싶다”며 “새롭게 법을 만들고 국가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인권의식이 성장해야 사회가 빨리 안정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에서 호사냑 부국장은 조금도 지치는 기색 없이 자신의 생각을 유창한 한국어로 거침없이 밝혔다.

앞으로의 활동 계획에 대해서는 북한에서 벌어진 인권 침해를 기록해 나중에 책임을 물을 근거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북한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기록하고 나중에 정의가 찾아오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기록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폴란드에서는 민주화가 이뤄진 후에도 과거 비밀경찰을 했던 사람들이 많은 퇴직금을 받고, 사회적으로 좋은 일자리를 차지해 문제가 됐었다”며 “과거 탄압받았던 사람들은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이 어려운 삶을 살고 그게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는데 오히려 시민들을 억압했던 사람들은 사회 기득권 세력으로 그대로 편입됐다. 북한에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

■요안나 호사냑 부국장은

●1974년 폴란드 바르샤바 ●바르샤바대 한국어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한국학 석사, 서강대 국제학 박사 ●주폴란드 한국대사관 ●헬싱키인권재단 ●북한인권시민연합 국제협력팀장 ●현 북한인권시민연합 부국장 ●서울시 명예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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