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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건축가 임형남·노은주의 키워드로 읽는 건축과 사회] 어디에도 없는 나를 위한 공간… 표준화를 거부하다

입력 : 2018-08-19 10:23:29 수정 : 2018-08-19 10: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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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아임 낫 데어(I’m Not There) / 먼 옛날 개인의 자유와 인권 주창한 / 中 전국시대 철학자·이단아 양주처럼 / 거장 밥 딜런도 끊임없이 규정에 저항 / 속박 받지 않는 개인의 삶·행복 노래 / 스티븐 홀도 “다수보다 개인위해 창조” / 음악서 건축 영감…현상학적 접근 모색 / 스트레토 하우스 등 독창적 감성 표현 / 규격·반복에 맞선 포스트모던과 상통
음악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한 스티븐 홀의 ‘스트레토 하우스’.
스티븐홀닷컴 제공
# 양주의 ‘위아설’, 오직 나를 위해서

양주(楊朱)는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이다. 시대적으로는 춘추시대의 공자와 노자, 그리고 이후의 맹자와 장자 사이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라고 한다.

양주의 사상은 조금 특이하다. 그는 삶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으며, 도덕이란 영악한 자가 소박한 사람을 이용하려는 기만책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좋은 평판도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위해 비싼 대가를 치르지만, 살아서는 누리지 못하고 죽은 다음에야 듣게 되는 허튼소리라고 주장한다. 다만 그가 직접 남긴 저서는 없고 ‘열자’(列子)나 ‘장자’ 등의 책을 통해 양주가 한 말을 들을 수 있다. ‘열자’에 나오는 그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자.

“천하의 아름다움은 순(舜)임금, 우(禹)임금, 주공(周公), 공자에게로 돌리고, 천하의 악한 것은 걸왕과 주왕에게로 돌린다…. 무릇 이 네 명의 성인들은 살아서는 하루도 즐겁게 살지 못하였으나 죽어서는 만세에 이름을 남기었다. 이름이란 실제로 취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니, 죽은 뒤에야 그를 칭송한들 알 수 없고, 그에게 상을 내린다 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무토막이나 흙덩이와 다를 것이 없다.”

어찌 보면 좀 과격한 시각이다. 이런 그의 입장에 대해 맹자는 “양자는 나를 위함을 취해서 털 한 오라기를 뽑아서 천하가 이롭게 된다고 하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며 비판했다. 그런 입장을 ‘위아설’(爲我說)이라고 하는데, 당시 혼란하던 시대에 개인의 이익이 국가의 이익과 대치되는 것을 맹자는 우려한 모양이다. 지금도 그런 소리는 거센 비판을 감수하며 혹은 눈치 보며 해야 되는 이야기인데, 당시로는 무척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동시대 인물인 묵자의 겸애와 공자의 인(仁)등 관계에 대한 사상을 비판하며 개인의 생명과 자유를 중시한 그를 유교적인 입장에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고, 후대에 조선의 많은 선비들도 좋지 않은 예로 양주를 들먹였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개인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생각이 비로소 싹트고 자리 잡음으로써 근대가 열렸다고 볼 때, 아무래도 양주는 시대를 너무 앞서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국가나 사회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구성원 개개인의 인생과 행복도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그의 이야기는 많이 와 닿는다. 신분의 높고 낮음, 남자와 여자, 강자와 약자 사이의 정의로운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개인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안티 대중문화와는 거리가 있었고, 대중을 선동하려는 야망도 없었다. 주류 문화를 대단히 시시하고 큰 속임수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창밖에 펼쳐진 얼음 바다 위를 어색한 신발을 신고 걷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가 어떤 역사 시대에 속하는지 몰랐고 시대의 진실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것을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말은 양주가 한 말이 아니다. 미국의 가수 밥 딜런의 이야기이다. 밥 딜런은 내가 음악을 듣기 시작할 무렵인 1970년대 초부터 이미 거장이었고, 그 후로도 50년 가까이 동안 계속 세계 음악계의 거장이라는 위치에서 내려오지 않는 대중음악의 전설이다. 가끔 살아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화석이나 다른 종류의 역사의 흔적 같다고 생각한다.
  
벨레브 아트 뮤지엄 스케치.

# 밥 딜런, 끊임없이 규정을 거부하다

밥 딜런이 내한 공연을 했다. 사실 나는 밥 딜런의 노래를 몇 곡 드문드문 아는 정도이고 그를 딱히 좋아하지도 않는 편이지만 공연을 보러 갔다. 그날은 올여름 무더위의 서막이 화려하게 열리던 칠월 하순 어느 금요일 저녁이었다. 만두 찜통을 덮은 하얀 천위로 올라오는 뜨거운 김 같은 열기가 아스팔트위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공연장에 들어가니 밴드의 공연치고는 무척 차분한 분위기였고 역시나 나이가 지긋한 분들이 꽤 많았다. 공연은 밥 딜런이 뭔가 심각하고 약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마치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는 엄격한 가장처럼 무대에 오르며 시작했다. 그가 무대의 가운데에 서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불렀으나 그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첫 곡의 중간까지 그런 상황이었는데 모두 당황하거나 수군거리지 않았다. 아마 나를 포함한 모든 관객들은 밥 딜런의 공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해 그냥 지켜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다들 밥 딜런은 보통의 가수가 아닌 무언가 다른 가수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이크가 조정되고 그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그건 노래도 읊조림도 아닌 조금 다른 소리였다. 몇 곡을 불렀는데 그 노래들이 내 귀에는 다 똑같이 들렸다. 뭔가 무심의 경지에 들어선 대가의 소리로 이해하려고 마음먹고 그냥 앉아 있었다. 서너 곡 부르더니 무대에 놓여있는 피아노에 앉아서 관객과 피아노를 사이에 둔 채, 그의 몸짓도 보이지 않는 상태로 노래를 이어갔다. 그리고 공연이 끝났다. 고맙다거나 잘 돌아가라거나 하는 한마디 인사조차 없이 출연자들을 주변에 죽 세우고 인사를 꾸벅하더니 들어가 버렸다.

“모든 게 어떻게 시작됐는지 모르겠고 나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몰라. 그러나 나는 여전히 길에 있고 새로운 만남을 향해 가고 있어. 우리는 늘 같은 걸 느껴, 다른 관점에서 봤을 뿐이지. 우울함에 얽힌 채로.” - ‘Tangled up in Blue’ 가사 중에서

집으로 돌아와 몇 달 전 아는 분이 내게 주었지만 몇 장을 읽다가 말고 책꽂이에 꽂아 두었던 밥 딜런의 자서전을 읽었다. 그 자서전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시간이 마구 혼합되어 있어, 연대기 순으로 이해하는 데 길들여져 있는 나에게는 무척 혼동을 주었다. 밑도 끝도 없이 음악에 입문해서 뉴욕에서 배회하는 시점으로 시작하더니 갑자기 이미 성공을 거둔 시점으로 옮겨져 녹음하고 휴가를 지내는 일상이 나오고 이어서 다시 뉴욕에서 음악가로 일어서는 과정으로 끝난다. 불친절의 극치이지만 글은 마치 노래 가사처럼 혹은 세상을 관조하는 관찰자처럼 카메라가 주변을 계속 훑어 보여준다.

“내 가사가 멋대로 추정되고, 그 의미가 논쟁에 휘말려 타락하고, 내가 반군의 대형, 저항운동의 대사제, 비국교도의 총책, 불순종의 대가, 식객의 리더, 배교의 황제, 무정부 상태의 대주교, 얼빠진 사나이로 공식 선정된 것에 진저리가 났다. (중략) 처음 제거해야 할 것은 나에게 소중한 어떤 형태의 예술적인 자기표현이었다. 예술은 삶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무튼 나는 더 이상 예술에 대한 굶주림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창조는 경험과 관찰과 상상력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이 중요한 요소들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밥 딜런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부과되는 멍에를 거부한다. 저항시인, 젊은이의 대변자 등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그의 모습은 밥 딜런이 아니다. 그건 우리도 모르고 그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그를 추정하고 단정하고 틀 안에 가둔다. 밥 딜런은 그것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바뀐 모습으로 나타난다.
 
스케치가 그대로 건축이 된 사례인 벨레브 아트 뮤지엄.

# 아임 낫 데어,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그런 모습을 영화로 표현한 것이 토드 헤인즈라는 특이한 감독이 만든 ‘아임 낫 데어’라는 특이한 영화였다. 그 영화에서 밥 딜런이라는 사람은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밥 딜런의 다양한 모습을 상징하는 여섯 인물이 나온다. 포크 음악에서 이탈하며 갑자기 전자기타를 들고 나와 연주하여 야유 받는 주드(밥 딜런을 가장 닮은 케이트 블란쳇), 젊은 시절 밥 딜런의 우상이며 밥 딜런에게 음악적 좌표를 설정해준 우디 거스리(마크스 칼 프랭클린), 시인 아르튀르 랭보(벤 휘쇼), 음악가 잭과 목회자 존(크리스천 베일), 전설의 포크가수 역할을 하는 영화배우 로비(히스 레저), 전설의 총잡이 빌리 더 키드(리처드 기어). 그리고 그 영화는 궁극적으로 “나는 그곳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 영화에서 제일 좋았던 장면은 수줍고 소심하던 크리스천 베일이 갑자기 목사가 되어 악어가죽구두를 신고 연설하다가 따발총을 발사하듯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었다. 그의 오른쪽 뒤꿈치에 선명한 악어의 살가죽이 내 눈에 아주 커다랗게 클로즈업되어 들어왔고, 그의 당당한 몸짓 속에서도 수줍음이 번져 나왔다.

밥 딜런은 계속 변신하지만 결국 한 사람이며 자신의 음악을 할 뿐이다. 그는 노벨 문학상 수상식에 선약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상소감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5만명 앞에서 그리고 50명 앞에서 공연해본 공연자로서 전 50명 앞에서 공연하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5만명은 한 가지 페르소나이지만 50명과 함께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각자 모두 개인이고 다른 정체성과 세계가 있습니다. 더 명확히 사물을 인식합니다. 정직함과 그것이 재능의 깊이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가 시험됩니다. 노벨 위원회(위원이) 소수라는 사실이 제게는 효과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건축가 스티븐 홀((Steven Holl, 1947~) 또한 “천 명의 집단을 수용하기보다는 한 명의 개인을 위해 창조한다는 생각이 내 교육 프로젝트와 주거 프로젝트에서 탐험하는 논쟁의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모더니즘 건축에서의 표준화와 반복이 끔찍한 환경을 창출했다고 생각한다.

공교롭게도 자신의 건축적 영감을 음악에서 자주 빌려온다는 스티븐 홀은 21세기 초,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사람(특히 건축가들이 좋하하는 스페인 잡지 ‘엘 크로키’가 사랑하는)이다. 그의 초기작 ‘스트레토 하우스’(Stretto House)는 작곡가 벨라 바르톡(Bela Bartok)의 1936년 작품 ‘현, 타악기,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을 모티브로 했다. 네 개의 악장을 통해 무거움과 가벼움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에 착안해, 빛과 공간의 구현을 단면과 평면에서 무거운 콘크리트와 가벼운 금속, 직선과 곡선 등의 디테일로 표현했다.
미술관의 주된 공간들은 3개 층으로 이루어지고, 서로 다른 종류의 빛을 갖는 세 개의 갤러리, 보고 탐구하고 만드는 (예술, 과학, 기술) 세 개의 행위들, 그리고 세 개의 동선 체계 등으로 구성된다.

그는 자신의 건축이 현상학적인 접근임을 적극적으로 표명하곤 했다. 1970∼80년대 미국의 건축적 논란을 주도했던 형태적, 언어적 조작과 후기 포스트 모더니즘의 테마인 건축의 물리적 특성에 대한 복귀보다는, 일종의 은유적이고 구술적인 접근을 통한 작업을 초기부터 해왔다.

그는 빛과 질감, 디테일, 그리고 중첩된 공간은 어떠한 질감의 조작보다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의미를 이룬다고 주장한다. 1987년 건축과 대지, 현상, 개념, 역사의 연결에 관한 최초의 선언인 ‘정박’(Anchoring)을 썼다. 대지와 문맥, 역사를 중시하는 점, 그리고 표준화와 반복의 근대적 공간에 대항했다는 점에서 포스트 모던 건축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나, 언어로서가 아니라 인식으로서 현상학적 텍스트를 적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할 수 있다.

특히 5×7인치 스케치북에 매일 한 시간씩 그린다는 수채화 스케치로 유명하다. 그 스케치를 스튜디오로 보내면 모형을 제작하고 그것이 다시 공간으로, 형태로 치환된다. 스케치가 그대로 건축이 된 사례인 벨레브 아트 뮤지엄(Bellevue Art Museum)의 개념은 3중성(Tripleness)이다. 미술관의 주된 공간들은 3개 층으로 이루어지고, 서로 다른 종류의 빛을 갖는 세 개의 갤러리, 보고 탐구하고 만드는 (예술, 과학, 기술) 세 개의 행위들, 그리고 세 개의 동선 체계 등으로 구성된다.

따로 떨어져 있는 세 개의 갤러리는 각각 약간씩 굽어 있으며 측벽의 구조체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갤러리로 향하는 경사로는 무대로서의 이중적인 기능도 갖고 있는 계단참에서 일단 멈추었다가 다시 진행된다. 올라가면서 관람객들은 탐구의 갤러리에 도착하는데 이곳은 2개 층 정도의 높이를 갖는 자연 채광의 공간으로 바로 옆에 예술가들의 거주 가능한 스튜디오를 갖고 있다. 광장을 굽어보면서 계속 올라가다 보면 빛의 정원을 갖고 있는 최상층에 이르러 끝나게 된다.

어떤 경향이나 이데올로기로 규정되지 않는 스티븐 홀의 건축은 당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독특한 감성과 개념을 드러내고 있다.

가온건축 공동대표·『내가 살고 싶은 작은 집』 공동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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