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음식점이 들어찬 골목 안쪽에 오래된 집들이 남아있다. 어디선가 망향가가 들리는 듯하다. 시인 이상국은 “우리는/ 우리들 떠도는 삶을 끌고/ 아침저녁 삐꺽거리며/ 청호동과 중앙동 사이를 오간 게 아니고/ 마흔 몇 해 동안 정말은/ 이북과 이남 사이를 드나든 것이다”(‘갯배 1’)라고 노래했다. 청호동 부근에 있는 수복기념탑에는 한쪽 팔에 보따리를 낀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북녘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을 담은 조각상이 있다. 북측 피란민이 많은 속초에 잘 어울린다.
박완규 수석 논설위원 |
이들의 간절한 소망은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나는 것이다. 모두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한다. 이산가족의 재회는 1964년 일본에서 처음 이뤄졌다. 1951년 함경남도 이원에 처자식을 두고 집을 나선 아버지가 북한 육상 대표선수로 도쿄 올림픽에 참가한 딸을 극적으로 만났지만 10분도 채 안 돼 다시 이별했다.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시작돼 이산가족 상봉 방법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다가 19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이 이뤄졌다. 평양에 간 남측 방문단 35명, 서울에 온 북측 방문단 30명이 꿈에 그리던 가족을 만났다. 고령의 어머니는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고 부녀는 부둥켜안고 울기만 했다. 이들이 헤어질 때 버스 창을 사이에 두고 애처롭게 손을 내미는 장면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했다. 그 후 2000년에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시작돼 2015년까지 20차례 열렸다. 상봉행사를 통해 약 2만명이 헤어진 혈육을 만났지만 재상봉이나 서신왕래로 이어지지 않은 일회성 행사에 그쳤다.
열흘 뒤 2년 10개월 만에 금강산에서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린다. 4·27 남북정상회담 판문점 선언에 따른 조치다. 20∼22일에는 남측 방문단 93명이 북측 가족을 만나고, 24∼26일에는 북측 방문단 88명이 남측 가족을 상봉한다. 우리 측 인원에는 101세 할아버지와 100세 할머니가 포함됐다.
이산가족 수는 점점 줄어든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겠거니 생각하다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에 상봉 신청을 한 13만여명 중 57%가 사망했고 생존자의 63%가 80세 이상 고령자다. 상봉 신청이 받아들여진 게 약 2000명에 불과하니 갈 길이 멀다. 더 이상 북한의 시혜적 태도에 의존해선 안 된다. 남북한 당국이 이산가족 인권보호 차원에서 접근해 전면적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상봉 방식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만찬 때 문재인 대통령의 건배사가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였다. 이산가족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상봉 정례화와 규모 확대는 물론이고 전면적 생사 확인 후 서신 교환이나 화상 상봉 등을 통한 접촉도 대폭 늘려야 한다. 이산가족의 나이를 감안하면 서둘러야 할 일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관계에서 가장 시급한 인도적 과제다. 이산가족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 동시대인의 도리라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박완규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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