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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진의청심청담] 과학기술시대, 인문학의 퇴조와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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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8-06 21:21:32 수정 : 2018-08-06 21: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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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 사회’가 아닌 ‘기술 사회’ / 獨·佛서도 철학은 이제 ‘들러리’ / 한국 인문학은 무용론마저 등장 / 인간의 삶 ‘기계화’될지도 몰라  제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있는 지구촌에 인문학의 위기를 알리는 경종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근대 서양철학의 중심지인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은 물론 아시아의 일본, 미국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국가의 인문학에 대한 정부투자와 지원을 보면 이공계와 과학기술 분야에 비해 대체로 10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이다. 이러한 인문학 퇴조현상은 인류문명의 과학기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인류는 어쩌면 과학기술이라는 이념과 신에 의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장 실용적인 과학기술이 이념이 돼버린 지금, 자유와 예술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인 인문학은 설 자리를 잃고 있는 셈이다. 이제 지구촌은 과학기술선진국과 후진국이 있을 뿐이다. 종래의 자유-자본주의와 공산-사회주의의 구분은 점차 무의미해져 가고 있다. 현대인은 치열한 과학기술경쟁 속에서 과학기술이 마련한 틀과 제도 속에 예속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내몰려 있다.
박정진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

일찍이 과학기술문명에 정신문화가 뒤따라가지 못하는 후진국문화현상을 두고 W F 오그번은 ‘문화지체현상’(cultural lag)이라고 명명했지만, 이제 모든 국가는 선진과학기술의 발전을 따라잡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자고 나면 달라지는 첨단정보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류는 다른 인문학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지경이다. 인간성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의 삶의 유형을 결정하고 있다.

애플 신화를 이룬 스티브 잡스의 “애플을 애플답게 한 것은 인문학과 기술의 결합이다”라는 말은 한편에서는 맞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맞지 않다. 인간의 상상력이 기술의 편의에 너무 매달려 있고, 그러한 상상력은 인간의 적응을 비웃고 날마다 ‘달아나는 수준’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 자체는 이제 새로운 기술에의 실험이며, 실험에의 적응을 위해 삶을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기술이 전개하는 세상의 프레임에 어쩌면 죄수처럼 꿰맞추어 살아야 할 신세로 전락했는지도 모른다.

근대문명의 슬로건이었던 자유(민주주의)와 평등(사회주의)과 박애(기독교)는 과학기술의 정보와 계산, 기계의 신 앞에 이미 굴종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은 이제 “인간은 죽었다”로 대체돼야 할 것인가. 호모 사피엔스는 진작부터 기계인간 사이보그가 될 준비를 마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인문학을 받쳐온 인간의 상상력과 자유의지와 합리적 삶은 이제 ‘기계적 삶’으로 대체돼 가고 있다. 인간은 생각도 기계가 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인간이 확보한 문명의 데이터는 포화상태로 인공지능(AI)이라는 노예를 요구하고 있다.

철학의 선진국인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철학의 종언이 선언된 지 오래다. 실제로 철학이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어쩌면 과학기술문명의 주변부에서 들러리로 옛 영화를 들먹이면서 말장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국은 숫제 과학과 실용주의가 지배하고 있고, 과학 철학은 과학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제 인간의 삶에 인간성이 개입될 여지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 말은 더 이상 철학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말이다. 과학기술이 이룩한 완벽한 ‘공학적인 삶의 튜브’ 속에서 개인은 부품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다.

인문학과 철학의 위기는 이제 그것의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식은 팔리기 위해 생산되며 더 이상 그 자체가 목표이기를 그쳤다”고 선언한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분석은 사용가치로서의 인문학에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인용되지만, 인문학은 대학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휩쓸려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인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에 스스로 갈 길을 잃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올해 한국연구재단의 총예산 5조59억원 중 과학기술 분야 비중은 63.3%(3조1707억원)이고, 인문사회 분야는 5.3%(2671억원)로 나타났다. 인문학 분야는 10분의 1도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과학과 이공계의 특성상 실험과 관찰에 따른 설비비용을 감안할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삶의 가치와 방향설정에 드는 비용은 푸대접을 받고 있다. 오늘날 대학은 취업률에 집착하고 있고, 이공계에 집중투자, 그리고 산학협동에서 기업적 마인드의 우위 풍조는 인문학의 위기를 불러왔다. 특히 선진국이론의 모방과 적용에 만족했던 한국의 인문학은 한국이 당면한 문제인 평화와 통일에 독자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효용론은 고사하고 무용론마저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인문학은 그동안 좌우를 막론하고 아직도 근대에 등장했던 서구 담론의 변형이나 동어반복에 머물고 있다.

사회 일각에서는 지식인집단의 무력화와 함께 코미디언이나 대중예능인, 방송인이나 스포츠맨, 그리고 정치가들이 나서서 지식인의 자리를 메우는 희화적 풍경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창의 사회’가 아니라 ‘기술사회’가 돼버렸다. 인문학도 정보나 지식의 축적을 통해 이용만 하는 기술학으로 변질돼버렸다. 생각은 남이 하고 나는 이용만 하는, 창의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인문학 노예사회’가 된 셈이다.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는 창의력과 유연성과 순발력이 부족하다. 만약 진리와 정의가 고정돼 있거나 과학기술처럼 정답이 있다면 이는 인문학의 종말을 의미한다. 너 나 할 것 없이 인류사회는 지금 물신숭배에 빠졌다. 마르크시즘은 차라리 관념적 유물론에 불과하며, 자본주의 시장경계체제나 과학기술지상주의는 유물론의 강력한 실천자로서 인간의 삶을 기계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박정진 평화연구소장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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