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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나의 길] 가슴으로 낳은 세 딸 키우며 ‘知天命’… 난 다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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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7-27 21:25:10 수정 : 2018-07-27 23:5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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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공직 마친 차성수 前 금천구청장 “사람은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순조롭게 돌아갑니다.”

지난 19일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차성수 전 금천구청장을 만났다. 차 전 구청장은 8년의 공직을 마치고 일반시민으로 돌아왔다. 차 전 구청장은 지난 6·13지방선거에 불출마했다. 주변에서는 의아해했다. 공약 대부분을 실현하고 주민과 공무원들로부터 털털하고 일 잘하는 구청장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태에서 3선 출마는 당연시됐고 당선도 따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는 불출마를 선택했다. ‘무슨 자리든 타의에 의해 물러나고 싶지 않다’는 소신이 영향을 미쳤다. 곧은 성격이 그를 재선에서 멈추게 했다. 그는 임기 동안 앞만 보고 달렸다. 8년 동안 구청장직을 맡으면서 일년에 일주일 이상 휴가를 간 적이 없을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 그의 말대로 에너지가 소진됐다. 이 상태로는 구정을 추진하는 동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구민들을 위해서는 열정을 갖고 일할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3선 제한이라는 것이 누가 봐도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아닙니까. 지난 8년 동안 구청장으로 재직하면서 지역발전의 디딤돌을 놓았다는 데 만족합니다. 또 일하는 조직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불출마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습니다.”
차성수 전 서울 금청구청장은 “교육에 희망이 없다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교육이 아이들의 힘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저출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학교가 교육뿐만이 아니라 돌봄도 책임져야 하고 그 중심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있어야 한다”며 “각 부처는 지자체에 예산만 지원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이재문 기자

그는 2010년 7월 구청장에 취임하면서 직원들과 함께 ‘구민우선 사람중심 금천’이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모든 사업과 정책은 사람을 우선에 두고 입안하고 시행했다. 직원들과 첫 상견례 때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는 사자성어를 강조했다. 신뢰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주문했다. 1년 뒤에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디서든 주인이 되도록 힘써달라고 당부했다. 주인의식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티가 안 난다고 봤다. 주인이 청소한 것과 하인이 청소한 것이 차이가 나듯이 수천억원을 쓰는 공무원이 주인답게 일하지 않으면 국가와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이슬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는 노적성해(露積成海)의 필요성을 마음에 새기자고 했다. 이슬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쌓이면 큰 바다를 이룰 수 있듯이 조금씩 자신이 맡은 일을 충실하게 하면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고 했다. 그 결과 공무원이 주인의식을 갖고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해내면서 조직문화가 일하는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그는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사회조정비서관을 거쳐 시민사회수석을 지냈다. 청와대를 나온 뒤 그가 “지방선거에 출마한다”고 하자 주변에서는 “국회의원을 하지 왜 구청장에 도전하냐”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 시민사회수석은 최고 선임으로 3명의 실장 다음이었다. 그가 청와대에 들어가자 주변에서 모두들 노무현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일 거라고 추측했다. 부산에서 교수로 재직한 데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고, 각종 토론회에서 사회를 본 이력을 감안하면 무리한 추측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부산에서 노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없었다. 청와대에서 임명장을 받을 때 처음 악수를 했다. “일면식도 없었지만 추천에 의해 막중한 자리를 임명할 정도로 노 전 대통령은 포용력이 컸다”고 그는 회상했다.

지방선거 출마결심도 노 전 대통령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단체장을 하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내용의 책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임기 내내 노 전 대통령의 마음으로 일했다고 했다. 구청장에 당선된 뒤 ‘콘크리트보다 사람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었다.

 
차성수 전 서울 금천구청장은 “교육에 희망이 없다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교육이 아이들의 힘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저출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학교가 교육뿐만이 아니라 돌봄도 책임져야 하고 그 중심에는 지방자치단체가 있어야 한다”며 “각 부처는 지자체에 예산을 지원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이재문 기자
그는 교수 출신답게 과도한 입시 위주의 획일식 교육으로는 미래가 없다고 진단했다. 아이들을 좌절시키고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안 되는 암기식 교육으로는 창의성과 주도성, 융합능력을 필요로 하는 4차산업혁명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를 배우는 등 사교육에 찌들어 생활하다가 대학에 진학하면 자기주도의 인생을 살아갈 방법을 몰라서, 또다시 취직을 위해 사교육으로 내몰리는 시스템에서는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교육의 틀을 바꾸어야 한다고 처방했다. 초·중학교 교육은 최소한의 기준만 정하고 나머지는 교육청에서 자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교육부가 손을 떼면 된다고 했다. 현장을 모르는 중앙정부가 모든 것을 결정해 전국을 획일적으로 만드는 것은 구시대 퇴행적 교육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2016년 5월11일 입양의 날에 입양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그는 세딸을 입양해 키우고 있다. 그는 나이 50이 되는 때부터는 나를 바꾸는 삶을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인간 차성수의 내용을 채우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이때 모든 대외활동을 접었다. 신학공부를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뭔가가 빈 것 같고 허전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 뭐냐를 놓고 고민하던 중 입양이 떠올랐다. 결혼 초기 아내와 입양을 결정했지만 실천하지 못했다. 그는 평소 눈여겨둔 경북 김천의 임마누엘보육원을 찾았다. 몇달 동안 주말마다 다니면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서 입양을 굳혔다.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둔 그는 2006년 6월 막내딸을 입양했다. 50세를 일년 앞둔 시기였다. 공교롭게도 막내딸 입양을 한 다음날 청와대에서 함께 일하자는 연락이 왔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 집을 떠나 혼자 방을 얻어놓고 생활했다. 일주일에 한번 집에 가면 29개월 된 막내딸이 너무 예뻤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을 이해할 정도였다. 그는 이때 입양이 힘들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오만(?)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막내딸에게 언니를 만들어주겠다고 결심했다. 6개월쯤 뒤 일곱살 큰딸을 입양했다. 큰딸은 보육원에서 지내면서 거짓말 등 안 좋은 습관을 배웠다. 아내가 큰딸의 잘못된 습관을 바로잡으려고 엄청 힘들어했다고 했다. 큰딸은 또 ‘차’ ‘파’ 등 파열음을 발음하지 못했다. 구강훈련이 안 된 것이 원인이었다. 큰딸은 밥을 못 씹었다. 밥을 먹으면 어금니로 보내 씹어야 하는데 이걸 배우지 못해 앞니로만 씹어 죽처럼 만들어 삼켰다. 아내가 옆에 붙어앉아 밥을 어금니로 보내는 방법을 가르쳤다. 6개월이 지나서야 큰딸은 비로소 밥을 정상적으로 씹어 삼켰다. 밥을 제대로 씹게 되자 파열음을 발음했다. 이 과정에서 아내는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고생했다. 큰딸 소식을 접한 보육원에서 “아이를 돌려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연락할 정도였다. 고진감래라고 어려운 시절을 슬기롭게 극복한 큰딸은 건강하게 성장했다.

그는 보육원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와 가정을 가르쳐 주는 사업을 벌였다. 보육원 아이들을 방학 때마다 교회 교인들의 가정에 보내 4박5일 동안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이때 둘째딸을 만났다. 그 아이는 다음 방학 때 7박8일을 함께 지냈다. 세번째 가정체험 때는 한달을 지냈는데도 보육원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당시 둘째는 엄마가 친권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둘째의 생모를 만나 “딸이 우리집에 살고 싶어하니 키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둘째 생모를 설득해 입양 허락을 받으면서 그는 세딸을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는 ‘딸바보’가 됐다.

그는 세딸을 키우면서 ‘거듭났다’는 생각을 한다. 막내딸을 통해 ‘사랑이 혈육에서 나오는 것만이 아니다’는 것을 절절히 느끼고 체험했다. 큰딸에게서는 고린도전서 13장이 어떤 의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의미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둘째딸을 통해선 ‘사랑은 소유가 아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구청장 출마했을 때 유치원생인 막내딸은 중학교 2학년이 됐다. 바쁜 일정 탓에 막내딸과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던 그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지금 딸과의 추억 만들기에 전력하고 있다.

그는 동아대 교수 시절 연구자의 가치보다는 교육자의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어떻게 하면 자기인생을 주인처럼 살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끌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끌고가는 인생을 살도록 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그는 구청장 재선에 성공한 2014년 동아대에 사표를 제출했다. 선출직은 사표를 강요하지 않지만 소모적인 폴리페서(polifessor) 논쟁에 휩싸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때 교수직을 그만두지 않았다면 정년까지 4년 정도 근무할 수 있었지만 물러날 때를 알고 후배를 위해 용퇴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박연직 선임기자 repo21@segye.com
■차성수는

●1957년 서울 출생 ●고려대 사회학과 ●1989년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 ●2003년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전문위원 ●2006년 대통령비서실 사회조정1비서관 ●2007년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2010년 7월∼2018년 6월 서울 금천구청장 ●2015년 노무현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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