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한국사의 안뜰] 시험문제 1100편 출제한 ‘호학(好學)군주’… 정약용을 키웠다

입력 : 2018-07-24 10:00:00 수정 : 2018-07-23 21:03:0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81〉 정조의 유별난 인재 키우기 7, 8년 전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성균관 스캔들’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이 드라마는 금녀(禁女)의 공간인 성균관에 여인이 유생 행세를 하면서 벌어지는 각종 에피소드를 엮은 것이었다. 드라마에 정조가 성균관에 감귤을 하사하고 글을 짓게 하거나, 특별한 과업을 부과하여 답을 하게 하는 등의 장면이 나온다.

왕이 성균관에 와서 직접 시험문제를 낸 것은 완전 허구는 아니었다. 정조는 실제 성균관 유생만이 아니라 지방유생에게까지 직접 시험문제를 내고 채점하는 일이 많았다. 왕의 하루 일과는 경연, 대신과의 정사 논의, 그리고 지방관이나 신임 관료 접견 등 하루 종일 사람을 만나야 했다. 정조는 바쁜 일정 중에 왜 유생이나 현직 관료 교육에까지 관심을 가졌을까?

정조의 어진 그 자신이 학문하기를 좋아했던 정조는 인재육성책에서 큰 관심을 기울여 유생과 관료를 대상으로 한 수많은 시험을 치렀고, 초계문신 등의 제도를 만들어 운용했다.
◆“왕은 인재를 잘 선정해야 한다.”

조선시대 왕이 신경 써야 할 주요한 일 중 하나가 어진 이의 등용이었다. 조선 건국 초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인주(人主)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잘 정하는 데 있다. 왕의 자질이 어리석거나 현명하기도 하며 강직하거나 유약하기도 하다. 국왕의 자질이 한결같을 수 없으므로 이를 보좌할 인재가 필요하다. 왕이 자신을 보좌할 인재를 잘 선정한다면, 그들이 국왕의 장점은 본받고 단점은 바로잡아 주어서 국왕이 옳은 길을 갈 수 있게 한다”고 하여 국정 운영에 있어 인재 선발이야말로 국왕의 책무임을 강조하였다.

그렇기에 조선의 왕들은 어진 이를 등용하기 위한 전 단계로서의 교육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성균관과 사학(四學)에서 어린 학생을 인성과 재능을 겸비한 유생으로 키우려 하였고, 학자적 자질이 뛰어난 젊은 현직 관료에게 학문에서 멀어지지 않게 기회를 주었다. 인재 키우기 일환으로 왕은 그들을 궁궐로 불러 시험을 치르게 하거나 우수한 유생에게 상을 내려서 그들의 학업을 격려하였다. 태종은 인재가 과거에 합격해서 관직에 진출한 후에는 전혀 학문에 가까이하지 않아 관료로서의 품위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탄하였다. 그는 문관 관료에게 매달 글을 짓게 할 뿐만 아니라, 현직 관료만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까지 만들었다. 세종은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를 두어 자질이 있는 젊은 관료를 뽑아 그들에게 일정기간 휴가를 주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 역시 성균관 교육제도를 체계화하고, 37세 이하의 문관 중에서 학자 관료를 뽑아 ‘초계문신’(抄?文臣)이라 하였다. 특히 정조는 규장각으로 하여금 초계문신의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 관리하게 하였다.

菊製 시험장에 게시된 글 정조대에 성균관 유생들은 1·3·7·9월에 정기적으로 제술시험을 치렀고, 이 중 9월 9일에 치르는 제술시험을 ‘국제’(菊製)라 불렀다. 사진은 국제 시험장에 게시된 글.
◆호학군주 정조의 유별한 교육정책

조선의 여러 왕이 교육에 관심을 가졌지만 정조의 인재 키우기는 유별났다. 그는 교육정책을 세우고 지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의 학업을 친히 관리하여 관료, 성균관의 유생, 과거 등 각종 시험문제를 친히 내고 채점도 하였다. 문제를 낼 때마다 반드시 답안을 작성하는 사람의 구상과 답안 내용까지 생각해 본 뒤에 출제하였다고 한다. 또 요행히 기출문제로 우수한 성적을 받는 일이 없게 하려고 기출문제를 따로 정리해 두고 참고하였다. 정조는 재위한 24년 동안 1100여 편이 넘는 시험문제를 냈으니 매달 4편 이상의 문제를 냈으니 중복 문제를 걱정할 만하다.

정조는 미래에 관료가 될 유생들이 학업에 게을리하면 따끔한 훈계를 하는 한편 그들 수준에 맞는 문제를 내 학업에 정진하도록 격려하기도 했다. 성균관 유생은 1월, 3월, 7월, 9월에 정기적으로 제술시험을 치렀다. 그중 9월 9일에 치르는 제술시험을 ‘국제’(菊製)라 하였다. 1798년(정조 22)의 국제는 정조가 친히 출제하였지만 시험장에 들어간 유생들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해 모두 백지를 제출하려 했다. 시험관이었던 승지가 이러한 상황을 정조에게 보고하자, 그는 시험장에 들어간 유생에게 깨우치는 글을 지어서 성균관에 보내 게시하게 했다. 이 글이 현재 장서각에 남아 있다.

정조는 “그대들은 성균관의 유생이니 독서량과 견문이 넓은 것이 나이 어린 사학(四學) 생도에 비하겠는가마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임금이 낸 문제에 대해 백지로 냈다는 것을 혹 들은 적이 있는가! …… 많은 선비가 노둔한 것은 바로 나의 수치다”라며 시험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유생을 나무랐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시험문제의 뜻을 풀이해 주고 3일의 기한을 주면서 답안을 다시 제출하라고 했다. 다음날인 9월 10일에 별도로 재시(再試)를 치렀다. 정조는 재시험에 응시한 172명의 유생 중에 143명만 답안을 제출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9월 11일 다시 재시를 치렀다. 이처럼 여러 차례 시험을 치른 것은 시험답안을 모두가 제출하게 하여서 중간에 포기하는 유생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정약용의 답안지 정조대에 관료로 활약한 정약용은 여러 번의 시험을 통과하며 자신의 재능을 뽐냈고,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사진은 정약용이 제출했던 시험지 중의 하나다.
◆정조의 수많은 시험을 통과한 정약용

정조는 현직 관료의 교육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학자 관료 정약용도 수많은 시험을 치렀다. 1783년(정조 7) 생원이 된 정약용은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각종 유생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어 상으로 물품, 점수, 대전통편·국조보감 등의 서적을 하사받기도 하고, 문과 회시에 바로 응시할 자격,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문과 전시에 바로 응시할 자격까지 얻었다. 성균관 유생 시험 결과가 국왕에게 보고되므로 정조는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계속 낸 유생 정약용을 알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의 시험을 출제하고 채점하면서 될성부른 유생들의 성장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렇게 성장한 유생이 관직에 진출하면, 또 초계문신으로 뽑아 계속 학문에 정진하게 하였다. 정약용도 1789년(정조 13)에 문과에 합격하자마자 좌의정 이성원(李性源)이 뽑은 초계문신에 들었다. 초계문신은 한 달에 두 번 제술시험을 보는데, 그중 매월 1일에는 국왕이 직접 시험을 보이는 친시(親試)가 시행되었다. 1년 동안 시행된 시험 점수를 합하여서 최종 등수를 가려 시상하였다. 초계문신은 정조의 뜻에 따라 과거 때에 사용되는 여러 문체 이외에도 배율(排律)·서(序)·기(記)· 시의(詩義) 등 다양한 문체를 익혀야 했다.

원창애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정약용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초계문신 시절 작성하였던 답안 중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정약용이 이 답안을 작성한 경위를 보면, 초계문신의 길이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790년(정조 14) 5월 정조는 친히 ‘정인이 북을 치다[鉦人伐鼓]’ 글제를 내었고, 답안 작성 문체는 시의(詩義)로 하게 하였다. 이 친시에서 정약용 등 네 사람이 외차상(外次上)을 받았다. 정조는 등급이 같은 이들에게 비교하는 시험문제를 냈는데, 글제는 ‘오객(五客)’이고 문체는 기(記)로 작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1차 비교시험 결과도 네 명이 동점이어서 2차 비교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정조는 또 ‘분유사(?楡社)’라는 글제를 내고 문체는 칠언고시로 하게 했는데, 이때 정약용이 삼중(三中)을 받아 1등을 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정약용의 친시 시권은 1차 비교시험인 ‘오객’을 기(記)로 작성한 것이다. 이 답안지는 정조가 직접 채점까지 하여서 답안지에 ‘어고(御考)’라고 표시되어 있다.

◆인재 없다는 탄식 앞서 육성책 고민해야

정조는 유생이나 초계문신의 교육에 있어서는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고 엄격하면서도 격려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정조의 교육철학 덕분으로 당대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과거에 합격하여 초계문신으로 뽑혀서 학문에 정진하였던 젊은 관료 173명 중에 18명이 훗날 재상이 되었다. 재상이 된 사람 이외에 적재적소에 등용되어 쓰임을 받았던 인재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정조가 인재를 길러낸 사례를 보면서 현재의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된다. 간혹 선거철이나 정부 각료 인선 때가 되면 사람이 없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인재는 단시간 내에 키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 교육을 백년대계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도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기에 앞서 인재를 길러내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풍토가 뿌리내렸으면 한다.

원창애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