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을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등지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대는 오지 않고’에서 시인이 진술한 것처럼 ‘혁명이 아니면 사치였던 청춘’이다. 양자를 절충하는 길은 상상할 수 없었다. 김중식(52) 시인은 그 시절을 건너오면서 시인의 길 또한 혁명 같은 고통의 길이라고 여겼다. 그 수난의 길에서 길어 올린 시들을 모아 1993년 펴낸 첫 시집 ‘황금빛 모서리’는 과연 황금빛이어서 지금까지 16쇄를 찍을 정도로 지속적인 갈채를 받았다.
25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을 낸 김중식 시인.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해탈과 혁명의 양안에 머리 찧을 때 나의 시 또한 종교이자 이념이었다”고 썼다. 하상윤 기자 |
“이번 삶은 늦었어,/ 급제동하는 순간/ 당신이 옳았다// 당신은 늦었다/ 낮술에 취했든 졸았든 그이를 생각했든/ 뱃가죽으로/ 아스팔트를 움겨쥔 채/ 두 획/ 혈서를 쓴 거다/ 빗길에서도 한 호흡에 폐를 채우는 타이어 타는 냄새// 외눈박이 가로등이 ㄱ자로 허리를 굽혀/ 하직 인사를 하지/ 길이 아닌 것도 아닌데/ 앞만 보고 죽어라 달린 것도 아닌데/ 자꾸 미끄러지는 삶/ 이번 생은 늦었다”(‘스키드 마크’)
급브레이크를 밟았을 때 길게 검은 자취로 남는 ‘스키드 마크’에 시인은 자신의 생을 대입했다. 생업의 궤도를 이탈해 다른 길로도 달려보았지만 급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이 생은 이미 늦었다는 통절한 회한이 밀려들곤 했다. 김중식은 기자 생활에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정작 실업의 공간에서는 가장으로서의 책무에 속이 타들어갔다. 그는 “순간의 환각이나 황홀은 찾아들겠지만 경제적 자유가 없는 한 또다시 노예가 될 뿐”이라고 말했다.
“돌아보지 않으면 길이 아니다 지구 반 바퀴를 뜬눈으로 날아야 하는 철새는 긴 목을 가슴에 비빈다. 얼마나 가야 할지를 따지는 것은 몸 밖으로 나간 정신처럼 얼마나 되돌아올 수 있을지를 가늠하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산, 올라갈 땐 괜찮았는데 왼쪽 무릎뼈가 쑤셔 주저앉았다가 한쪽 발로 하산할 때, 나는 내가 지난 세월에 얼마나 날뛰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울지도 못했다.”(‘늦은 귀가’)
이번 시집은 지난 25년 동안 변화한 삶과 생각의 궤적을 순서대로 담았다. 초반부에는 여전히 세상이 지옥이지만 갈수록 사막을 낙타로 건널 수도 있고, 사랑이나 공동체 정신이 그 징검다리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으로 나아간다. 그는 후반에 이르러 “그 어디든// 상처가 아문다면/ 거기가 태양 아래 1번지”라고 ‘태양 에너지’를 긍정하고, “사막에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 없는 곳이 사막인 거”라고 ‘바람의 묘비명’을 쓴다.
출가한 차창룡(북한산 중흥사 주지) 시인이 1966년생 말띠 벗의 귀환을 기리는 발문을 시집 말미에 붙였다. 그는 “김중식은 비관주의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비관주의자였다가 자연스레 비관주의를 극복했음에 분명하다”고 오랜만에 문단 속세를 향해 말문을 텄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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