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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땅서, 동해에서… 피서지서 보낸 ‘休 에세이’

입력 : 2018-07-12 21:20:15 수정 : 2018-07-12 21: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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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 18명 명문 모은 ‘성찰의 시간’ 눈길 바야흐로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피서철이다. 이런 계절에는 두말할 것도 없이 산이나 바다가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1930~1940년대 더위를 피하는 풍경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나 분단 이전 자유롭게 북쪽의 명소들까지 넘나들며 자연을 누리는 모습은 신선하고 흥미롭다. 한국 문학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문인 18명이 피서지에서 보낸 명문들을 모은 ‘성찰의 시간’(임현영 엮음, 홍재·사진)이 반가운 이유다.

승려 시인 한용운(1879~1944)은 1941년 8월 원산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기차에 올랐다. 그는 최근 북한에서 관광지 개발에 힘쓴다는 갈마지구 갈마 역에서 내려 명사십리로 갔다. 해수욕을 유난히 좋아했던 한용운은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수영복도 입지 않은 채 바다로 뛰어들었다.

한용운
“해안의 남쪽에는 서양인의 별장 수십 호가 있는데, 해수욕의 절기에는 조선 내에 있는 사람은 물론 동경, 상해, 북경 등지에 있는 사람들까지 와서 피서를 한다 하니 그로만 미루어 보더라도 명사십리가 얼마나 명구(名區)인 것을 알 수가 있다. …목적이 해수욕인지라 옷을 벗고 바다로 들어갔다. 그 상쾌한 것은 말로 형언할 배 아니다. 얼마든지 오래하고 싶었지마는 욕의(浴衣)를 입지 아니한지라 나체로 입욕함은 욕장의 예의상 불가하므로 땀만 대강 씻고 나와서 모래 위에 앉았다가 돌아보니, 김군은 욕의 기타를 사가지고 돌아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석
백석(1912~1996)이 1938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 기고한 ‘동해’라는 수필은 수려한 문장으로 인해 감흥이 배가되는 명문이다. 

이효석
이상
이육사
“이렇게 맥고모자를 쓰고 삐루를 마시고 날미역 내음새 맡으면 동해여, 나는 그대의 조개가 되고 싶읍네. 어려서는 꽃조개가, 자라서는 명주조개가, 늙어서는 강에지조개가. 기운이 나면 혀를 빼어 물고 물 속 십 리를 단숨에 날고 싶읍네. 달이 밝은 밤엔 해정한 모래장변에서 달바라기를 하고 싶읍네. 궂은 비 부슬거리는 저녁엔 물 위에 떠서 애원성이나 부르고, 그리고 햇살이 간지럽게 따뜻한 아침엔 이남박 같은 물바닥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놀고 싶읍네. 그리고, 그리고 내가 정말 조개가 되고 싶은 것은 잔잔한 물밑 보드라운 세모래 속에 누워서 나를 쑤시러 오는 어여쁜 처녀들의 발뒤꿈치나 쓰다듬고 손길이나 붙잡고 놀고 싶은 탓입네.”

노천명
시인의 익살은 웃음을 짓게 하면서도 낭만적이고 다감해서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후대가 폭염을 잊게 한다. 소설가 이효석(1907~1942)은 평양에서 여름을 보내는 ‘소하일기’를 1939년 8월 매일신보에 기고했다. 그는 “능라도 기숡에 배를 세우고 아래편에 무수히 떠 있는 유선들의 유흥 광경을 바라보고 포류의 채색의 군상을 바라봄도 일흥”이라면서 “백은탄 옆 반월도 기슭에 터를 잡았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문 뒤”였다고 적었다. 능라도는 대동강 가운데 있는 경치 좋은 섬이요, 백은탄은 능라도 바로 아래 여울이다. 그는 “적벽부를 외면서 강변을 바라보니, 적벽의 운치가 따로 없었다”면서 “모란봉의 독고한 자태며, 강기슭으로 길게 뻗쳐 내려간 등불, 강 위에 뜬 무수한 흥겨운 배의 풍경은 적벽 이상의 것이었다”고 묘사했다.

채만식
“가난하지만 무명처럼 튼튼한 피부에는 오점이 없고, ‘츄잉껌’, ‘초콜레이트’ 대신 달짝지근한 꼬아리를 부는 이 숭굴숭굴한 시골 새색시들을 나는 더 알고 싶습니다. 축복해주고 싶습니다. 교회는 보이지 않습니다. 도시 사람들의 교활한 시선이 수줍어서 수풀 사이로 숨어버리고 종소리의 여운만이 근처에 냄새처럼 남아서 배회하고 있습니다. 혹 그것은 안식을 잃은 내 영혼이 들은 바, 환청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이 친구의 고향인 평안북도 성천의 궁벽한 산촌에 머물며 남긴 ‘산촌여정’(山村餘情)도 대표적인 명문이다. 이육사는 함경남도 석왕사에 들른 이야기를, 노천명은 휴가를 얻어 묘향산에 다녀온 기행문을 ‘향산일기’에 풀어낸다. 최서해는 남쪽 끝 해운대에 들른 이야기를, 채만식은 고향 군산에서 지금은 새만금 공사로 육지가 됐지만 당시에는 해수욕장 개장으로 유명했던 섬 비응도의 풍경을, 강경애도 자신의 고향 황해도 몽금포의 풍광과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를 흑백사진처럼 재현한다. 이들 외에도 이태준 계용묵 김상용 정지용 노자영 이광수 유치진의 글이 실렸다. 김남천(1911~1953)은 피서지 대신 ‘냉면’에 대한 평안도 사내의 소회를 에필로그로 대신했다.

“속이 클클한 때라든지, 화가 치밀어 오를 때 화풀이로 담배를 피운다든지, 술을 마신다든지 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럴 때 국수를 먹는 사람의 심리는 평안도 태생이 아니고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도박에 져서 실패한 김에 국수 한 양푼을 먹었다는 말이 우리 시골에 있다. …모든 자유를 잃고, 음식 선택의 자유까지 잃었을 때 항상 애끊는 향수 같이 엄습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식욕의 대상은 우선 냉면이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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