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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릴 옥죄는 운명의 힘 누구도 거부할수 없나

입력 : 2018-07-05 21:07:18 수정 : 2018-07-05 16: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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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여인’ 펴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 / 父子 살해 설화로 동서문명 속성 성찰 / 치밀한 복선·이야기 강렬한 몰입감 / ‘운명의 저주’ 보다 벗어날 수 없는 굴레 / 혼재돼 있는 질곡에 현대인의 속성 빗대 아버지라는 존재는 예로부터 동서양 문명에서 중요한 상징이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서양에서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할 운명이라는 신의 저주를 받고 태어난 오이디푸스 설화다. 그의 부친은 그 운명을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아들에게 살해당하고 그 아들은 뒤늦게 자신의 죄를 깨달은 뒤 스스로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채 황야로 나선다. 운명은 결국 피할 수 없다는 전설인가. 동양에서는 반대로 페르시아의 민족시인 피르다우시의 대서사시 ‘왕의 서’에 나오는 아들 살해 설화가 유명하다. 아버지 뤼스템은 아들인 줄 모르고 아들 쉬흐랍을 대결 끝에 죽이고 이를 지켜보던 어머니는 서럽게 통곡을 한다. 
이스탄불을 무대로 10번째 장편소설을 펴낸 터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 그는 동서양의 부자 살해 설화를 끌어와 동서 문명의 속성을 성찰하면서 현대인의 운명을 들여다보았다.
민음사 제공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는 반면, 쉬흐랍은 아버지에게 죽는다. 하나는 부친 살해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식 살해 이야기다. 서양 문명에서는 부친 혹은 신을 살해함으로써 개인주의를 완성하고, 또 한편에서는 아들을 살해함으로 아시아적 가부장의 권력을 지킨다. 동서 문명의 충돌을 소설에서 천착해온 터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오르한 파묵(66)이 이 두 설화를 현대의 이야기로 10번째 장편 ‘빨강 머리 여인’(이난아 옮김, 민음사)에 절묘하게 녹여냈다. 치밀한 복선과 신선한 플롯으로 강력하게 몰입시키는 노작이다.

‘젬’이라는 열여섯 살 고등학생이 아르바이트로 우물을 파는 데 동참한다. 아버지 부재 상태로 성장한 그는 우물을 파는 장인 ‘마후무트’와 짝을 이루어 이스탄불 외곽 지역에서 일을 했다. 이때 그는 ‘신비롭고 슬픈 눈을 가진 아름다운 입술의 빨강 머리’ 유랑극단 여인을 만나 짧은 사랑을 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아버지의 연인이었던 이 여인은 젬보다 두 배를 더 산 서른세 살 연상녀였다. 깊은 지하에서 땅을 파던 아버지 같은 이의 머리 위로 흙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실수로 떨어뜨린 뒤 그는 도망친다. 이후 그는 운명을 피하려면 운명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역설을 받들었다.

“모든 사람들처럼 평범한 ‘보통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나도 오이디푸스가 취했던 행동과 정반대, 그러니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만 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오이디푸스는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살인자가 되었고, 살인자가 누구인지 궁금했기 때문에 자신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설은 전설일 뿐, 그는 운명을 피해가는 듯싶었다. 좋은 여자를 만나 부동산과 건설 쪽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면서 ‘쉬흐랍’이라는 회사는 승승장구한다. 쉬흐랍이란 아버지 같은 이를 우물 파는 땅 속에 방기하고 도망친 죄의식으로 관심을 갖게 된 페르시아 설화 속 살해당한 아들 이름이다. 젬이 아버지처럼 여기는 우물 파던 마흐무트에게 오이디푸스 설화를 들려주었을 때 그는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신이 말한 대로 되었군. 그 누구도 운명을 거역할 수 없는 거지.” 그는 전설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까. 

이 소설의 치명적인 결말을 발설해버리면 독서를 심대하게 방해하는 행위일 수 있다. 다만 운명이라는 것을 신봉하진 않지만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도 없는 질곡이 혼재돼 있다고 귀띔해줄 수는 있다. 운명의 저주를 납량극처럼 전개하는 게 아니라, ‘문명의 본질과 그것이 부친 살해와 자식 살해라는 개념에 접근하는 방식 사이의 연관성’을 현대인의 속성에 대입하여 성찰하게 하는 형식이다.

아버지가 떠났다고 젬이 말했을 때 빨강 머리 여인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너도 다른 아버지를 찾아. 이 나라에 아버지는 많으니까. 국가라는 아버지, 신이라는 아버지, 장군 아버지, 마피아 아버지…. 여기서는 아무도 아버지 없이 살지 못하니까.” 젬은 번민한다. “우리는 항상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머릿속이 혼란스럽거나 우리 세계가 허물어졌을 때, 우리 영혼이 번민에 찼을 때만 아버지를 원하는 것일까?” 후일 젬의 사생아는 말한다. “아버지 없이 자라면 세상에 중심부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결국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그래서 삶에서 어떤 의미를, 어떤 중심을 찾으려 애쓰죠.” 결국 연극무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실에서도 통곡해야 하는 운명의 빨강 머리 여인은 말미에 이렇게 묻는다.

“아버지들이 아들들을 죽이든 아들들이 아버지들을 죽이든 남자들은 영웅이 되고 나에게 남겨진 일은 우는 것뿐이었습니다. …세상의 질서는 어머니들의 울음 위에 세워졌지요. …삶은 전설을 반복한답니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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