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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인천 미추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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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6-17 23:16:58 수정 : 2018-06-17 23: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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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 건국 설화에 미추홀(彌鄒忽)이란 지명이 나온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태어난 비류와 온조 형제는 이복형제 유리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자 추종세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다. 미추홀은 물이 짜고 땅이 습해 살 만한 곳이 못 돼 비류는 후회 끝에 죽고, 백성들은 위례성에 자리 잡은 온조에 합류했는데 그후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다는 것이다.

미추홀은 ‘물의 고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의 인천이다. 문학산 일대가 도읍지터로 추정된다. 정상에는 백제시대 석축 산성인 문학산성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선 ‘남산석성(南山石城)’이라 칭하고 “사면이 높고 험하다”고 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문학산 위에 비류성의 터가 있고 성문의 문짝 판자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성안에 비류정(沸流井)이란 우물이 있다”고 했다. 그 주변 지역에서 지금도 백제계 타날문 토기 조각들이 나온다.

미추홀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실학자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인천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고구려 때의 매소홀현(買召忽縣)인데, 혹은 미추홀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는 소성(邵城)이라 고쳤다가 고려 때에 수주(樹州)에 예속시켰고, 뒤에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켰으며, 다시 인천이라 고쳤다. 공양왕이 경원부(慶源府)로 승격시켰다가, 조선 태조 원년에 다시 인주(仁州)라고 하였는데, 태종이 인주군이라 고쳤고, 세조 때 다시 부로 승격시켰다.”

인천 남구의 명칭이 7월1일부터 ‘미추홀구’로 바뀐다.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했다. 남구가 애초 인천 남부지역 전체를 관할했지만 행정구 분할로 남동구와 연수구가 떨어져 나간 뒤엔 인천 중심부만 남아 이름과 맞지 않는 데다 지역 정체성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다. 동서남북의 방위식 지방자치단체 이름이 바뀌는 것은 전국 최초다. 인천 남부경찰서와 남부소방서도 각각 미추홀경찰서와 미추홀소방서로 바뀐다. 인천 시민들의 역사문화 정체성이 깨어나고 있음을 뜻한다. 한반도의 관문인 인천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박완규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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