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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같은 발굴로 일제가 망친 가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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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6-11 07:37:22 수정 : 2018-06-11 10: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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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과제로 정해졌지만 사료 절대 부족 / 연구의 양적·질적 성장 어려워 높이 8m, 상부 폭은 최대 40m에 이르는 가야의 토성이 경남 함안에서 확인됐다. 좀 더 발굴이 진행되어 봐야 알겠지만, 높이는 10m에 달하지 않겠냐는 게 토성의 발굴을 진행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예상이다. ‘추정’이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으나 대가야, 금관가야와 함께 가야연맹을 이끌었던 아라가야의 왕성이라는 게 연구소의 잠정 결론이다. 이 정도 규모의 왕성을 조성하려면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권력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게 자연스럽다. 

지난 7일 경남 합천의 아라가야 왕성추정지에서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관계자가 유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간의 발굴 성과나 출토 유물들을 보면 가야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거 보다 훨씬 강력한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사료가 워낙에 부족하니…”

지난 7일 토성 발굴 현장에서 만난 연구소 강동석 학예연구실장의 말이다.

가야가 고구려, 신라, 백제에 비해 여전히 미지의 고대국가로 남아 있는 건 그의 말처럼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고대사 자료 부족은 가야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나 유독 사정이 안 좋은 건 사실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상대적으로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중심은 역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다. 일본서기에도 관련 내용이 전하긴 하지만 일본의 사서라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하다. 한국 고대사 연구는 중국 사서에도 크게 의지하지만, 가야과 직접 관련된 것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가야사 연구가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로까지 정해진 상황이라 더욱 아쉽다. 인력, 재원의 투입이 늘더라도 사료가 부족한 상황에서는 연구의 양적, 질적 성장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일제강점기에 옛 가야 지역에서 벌어진 도굴이나 다를 바 없었던 고적조사다. 

토성 발굴 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말이산 고분군’(사적 515호)이 있다. 아라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37기의 대형 고분들이 열을 지어 있는 곳이다. 그 곳에 세워진 안내판의 문구 중 일부다.

경남 함안의 말이산 고분군에는 가야의 고분들이 줄지어 서있다. 가야 고분은 일제강점기에 도굴 혹은 도굴에 가까운 학술조사가 이뤄져 상당부분이 훼손됐다.

“말이산 4호분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졸속 발굴된 4기의 고분 중 유일하게 발굴상황이 알려진 고분이다.”

일제는 한반도의 영구 지배를 꿈꿨고, 그 방편으로 생각했던 게 한국사 연구다. 이에 따라 일제는 입맛에 맞춘 이른바 ‘식민사관’이라는 게 만들어졌다. 식민사관의 주요 내용 중 하나가 ‘임나일본부설’이다. 고대 가야 지역에 일본이 한반도 지배를 위해 설치했던 기관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일제는 임나일본부가 존재했으며, 일본이 고대 한반도를 지배했던 증거를 찾겠다며 가야 고분에 대한 학술조사를 실시했는데, 말이 학술조사이지 도굴이나 진배없었다.

이마니시 류, 세키노 타다시, 도리이 류조, 구로이타 가쓰미, 야쓰이 세이이치 등 대표적인 일제관학자들이 주도하는 창녕, 고령, 함안, 김해, 성주, 선산 등지에서의 가야 고분 발굴이 진행됐다. 대가야 고분 수백 개가 분포해 있는 고령 지산동 고분군을 발굴한 야쓰이의 조사는 전형적인 사례다. 그는 1918년 9월 27일부터 10월 23일에 걸쳐 성산 1·2·6호분, 지산동 1·2·3호분, 창녕군 교동 21·31호분 등을 발굴했는데 대개는 고분 1개에 대한 조사를 2∼3일 만에 해치웠다.

이런 조사에서 고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각종 정보가 제대로 확인되고, 축적될 리 없다. 발굴한 유물은 일본으로 가져가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가야 고분에서는 상당한 양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강남 창녕의 고분군과 전남 나주 반남 고분군에 대한 조사에서는 마차 20대, 화차 2량 분의 유물이 나왔다고 한다. 1915년, 1917년 구로이타가 주도한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의 소장처가 동경제국대학으로 되어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날림 발굴의 또 다른 부작용은 부장품이 많은 고분의 소재를 알려주는 역할을 해 도굴을 사실상 조장했다는 것이다. 우메하라 스에지가 쓴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다수의 창녕 고분군은 야쓰이의 발굴 후 계속적으로 지방 인사들의 도굴이 성하여 지금은 거의 내용물을 잃었다고 할 정도이다. 그간 2, 3회 정도 총독부 관원에 의해 조사를 행하였으나 부장품은 이미 산일되어 대구의 이치다 지로, 오구라 다케노스케 등의 소장으로 돌아갔다. 그 중 귀중한 것은 아국(일본) 국보나 중요 미술품으로 지정된 귀중품도 있다.”

선산 일대의 도굴 피해가 특히 심했는 데 일제 학자 스스로 “현대인의 죄악과 땅에 떨어진 도의를 보려고 하면 이 고분군집지를 보아야 할 것”이라고 밝힐 정도였다.

고분은 마구잡이로 파헤쳐지고, 출토 유물은 빼돌려졌으니 발굴조사로 축적되는 정보가 많을 리 없다. 가야 관련 문헌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지라 이런 상황은 더욱 아쉬울 수밖에 없다.

국정과제가 된 가야사 연구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인력과 재원의 투입은 늘고 있고, 연구량이 증가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강동석 실장은 “어려움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국정과제로 정해지면서 연구자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연구의 양적인 증가도 있어 잘된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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