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4학년 때, 휴학 후 공무원 시험을 시작한 이윤아(25·여·고려대 대학원 통계학 전공)씨는 힘들 때마다 BTS의 노래를 찾아 들으며 스스로를 다잡곤 했다. 뭐라도 열심히 해야 하는 시기인 게 맞는데 혼자만 방향을 찾지 못하고 나부끼는 것만 같아 조바심만 커질 무렵 이씨는 7급 공무원이 ‘인생의 정답’이라고 급히 결론을 내리고 공부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확신이 없었던 수험생활은 힘들었고 취업준비에 돌입한 친구들은 각자의 일로 바빴다.
매일 흔들리며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씨는 BTS의 ‘Lost’ 노랫말에서 위로를 받았다. 이씨는 “‘길을 잃는단 건 그 길을 찾는 방법…’이란 가사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던 저에게 버팀목이 되었던 것 같아요”라고 전했다. 요즘도 BTS의 일상이 담긴 동영상 등을 찾아 보곤 하는 이씨는 “데뷔 초창기, 무시당하던 시절의 이야기들을 회상하는 BTS의 영상들을 보고 있으면 힘들게 살고 있는 나도 방탄처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행복이 찾아올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더 이상 모든 게 완성되어 등장한 아이돌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를 내가 픽하고(선택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발전 과정을 지켜보는 것에 게임하듯 재미를 느끼는 시대가 도래한 거죠.”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팬들이 BTS를 알리고 지지하기 위해 각종 아이디어 콘텐츠를 생산하고 이를 SNS에 열성적으로 공유하는 현상을 소개하면서 “‘아이돌 팬덤’이 또 한 번의 진화에 성공했다”는 진단을 내렸다.
‘힐링’ ‘소통’ ‘연결’
이 세 단어는 세대와 국경을 뛰어넘은 BTS 팬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기자가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들이다. 대학생과 취업준비생, 40대 주부, 30대 교사, 각국의 중고교생, 필리핀 회계사 등. 저마다 처한 환경은 달랐지만 BTS에 대한 팬심을 키운 자양분은 ‘삶의 위안’이었다.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BTS는 단순한 스타 이상의 존재로 다가왔다.
◆아이돌의 진화, 멀고 먼 스타에서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존재로
“꿈이 없어도 괜찮다”(‘낙원’), “괜찮아 자 하나 둘 셋 하면 잊어”(‘둘!셋!’) 등은 BTS 멤버들의 경험이 녹아 있는 노래들이다. 노래를 통해 팬들과 BTS는 친구 이상의 동질감과 연대감을 느끼고 있다.
2013년 데뷔 후에 “곧 사라질 그룹” “이름부터 우스꽝스러운 그룹” “다른 아이돌 스케줄 펑크 내면 대타 뛰는 그룹”이라는 등의 멸시와 조롱에 시달려야 했던 BTS다. 그런 ‘고난의 시기’를 노력과 실력으로 이겨내며 한 걸음씩 치열하게 성장한 과정을 알기에 팬들은 BTS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울고 웃는다.
문화평론가들은 BTS 팬들이 느끼는 이런 감정은 팬들이 BTS를 톱스타 같은 ‘멀고 먼 존재’로 느끼는 게 아니라 친구처럼 ‘가까운 존재’로 느끼기에 가능했다고 분석한다.
홍석경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대형 소속사의 아이돌일수록 개개인의 SNS활동 등에 대한 통제가 강하고 ‘최고의 사진’ 등이 엄선돼 공개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BTS의 SNS를 보면 A급, 완벽함을 추구하기보다 B컷 사진, 일상의 모습을 여과 없이 공개하려는 경향이 눈에 띈다”며 “팬들보다 성공한 자신을 위에 두는 식으로 위계를 짓기보다 브이라이브 등을 통해 팬들과 수평적으로, 예의바르게, 하지만 솔직하게 소통하려는 모습들이 팬들과의 간극을 좁히고 팬들에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 같다”고 전했다. 홍 교수는 “팬들에게 존경을 보내는 BTS의 태도는 해외 스타들에게서는 이례적인 모습이어서 해외에서도 팬덤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진화하는 팬덤, 후원자 역할 자처하며 세대 간 소통 역할
대중문화분석 전문가들은 BTS가 진일보한 퍼포먼스 능력,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사회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곡을 스스로 작곡하는 능력, 팬들과의 격을 허문 소통 등의 측면에서 ‘아이돌의 진화상’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했다. BTS 팬들은 스타를 일방적으로 추종하기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BTS를 알고 좋아할 수 있도록 알리는 ‘동반자’ 또는 ‘후원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BTS의 팬이라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각종 기부 활동에 앞장서고 있는 것도 기존 팬덤 현상과는 차별화되는 대목이다.
BTS의 팬들 중에는 부모와 자녀가 함께 팬 활동을 하고, 교사와 학생이 같이 BTS를 좋아하는 등 세대 간 장벽을 허물고 팬 활동을 즐기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남성 아이돌의 팬은 여성이라는 편견을 깨고 수많은 해외 남성 팬들이 “방탄의 헤어, 얼굴, 보이스, 퍼포먼스와 사랑에 빠졌다”며 열광하고 있는 것도 이채롭다. 자녀나 제자 등을 통해 BTS를 소개받은 팬들이 많다 보니 BTS 팬덤은 세대와 젠더의 벽을 허무는 긍정적 효과를 내기도 한다.
홍석경 서울대 교수는 “BTS의 팬덤이 향후 인종이나 젠더, 세대 간 갈등을 완화하고 세대 간 커뮤니케이션을 증진하는 데 지속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해외 팬들 역시 방탄소년단을 주변 지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있다. BTS 영상이 올라간 유튜브 영상들을 보면 서로 자기 나라 팬덤이 더 강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갑론을박하는 댓글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필리핀인 팬 레이철(24·여·회계사)은 “필리핀 사람들이 BTS를 더 많이 좋아할 수 있도록 SNS를 통해 열심히 홍보하고 있고 그것 자체가 큰 즐거움”이라며 “BTS와 관련된 각종 아이디어를 나누다가 보면 모르는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고 일상을 공유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썼다.
월드스타 방탄소년단(BTS)의 파급력이 주식시장에서도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중소 기획사였던 빅히트엔터테인먼트(빅히트)의 대표는 단숨에 연예계 주식부자 1위 자리에 올랐다.
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BTS의 소속사 빅히트의 기업가치는 약 7834억원으로 평가됐다. 빅히트의 대주주인 방시혁(사진) 대표의 지분 50.88%(84만9870주)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3900억원에 달한다. 이는 그동안 연예계 주식부자 1위 자리를 지켜온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대표의 평가액 1847억원(지분율 19.28%)을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다.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의 주식평가액 1398억원(지분율 16.14%)과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의 평가액 895억원(지분율 17.33%)과 비교해도 2∼4배 이상 차이가 난다. 기획사의 시가총액만 놓고 보면 아직 SM이 9750억원으로 1위, 이어 JYP가 8080억원으로 2위, 그 뒤에 빅히트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빅히트가 상장되면 시총 1조원은 넘을 것으로 예상돼 이 순위도 조만간 뒤바뀔 것이라는 게 증권가의 관측이다.
영업이익 면에서는 이미 빅히트가 주요 기획사를 넘어섰다. 빅히트의 지난해 매출액은 924억원, 영업이익은 325억원으로 영업이익 기준으로는 3대 기획사(SM 109억원, JYP 242억원, YG 195억원)를 앞질렀다. 이기훈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올해 예상 실적을 감안한 빅히트의 상장 시 시가총액은 최소 1조2000억원에서 최대 1조6000억원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이 연구원은 빅히트의 올해 실적은 매출액 1400억원, 영업이익 500억원, 순이익 400억원 이상을 무난히 기록할 것으로 내다봤다.
넷마블게임즈는 지난 4월 빅히트의 지분 25.71%를 2041억원에 매입했다. 이를 계기로 BTS의 음악과 지적재산권을 활용한 게임 등을 내놓을 계획이다. 증권가에서는 방준혁 넷마블 의장과 방 대표가 친척이라서 기업가치를 높게 평가해준 것이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지만 넷마블 관계자는 “두 분은 공시 범위인 6촌 이내 혈족이나 4촌 이내 친·인척에 포함되지 않을 정도로 먼 친척”이라며 의혹을 부인했다. 빅히트는 올해 상장을 위한 예비심사에 오를 것으로 예상되지만 빅히트 측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빅히트 관계자는 “상장과 관련해 아직 아무런 계획도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김라윤·조병욱 기자 ry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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