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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유쾌하게 때론 서늘하게… 다른 빛깔 삶의 조각들

입력 : 2018-06-07 20:56:41 수정 : 2018-06-07 20:5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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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허리세대 남성작가 3人 신작 / 8년 만에 소설집 낸 김종광 / 충청도 범골 사람들 사연 글에 담아내 / 유머·페이소스로 버무린 9편의 소설 / 재치있게 현실 파고드는 이기호 / 구체적 인물 이름 제목 삼은 단편 7편 / 삶의 오류와 모순 신랄하게 드러내 / 섬뜩한 상상력 선보인 박형서 / 연금 많이 타는 노인 죽임 당하는 얘기 / 초고령사회 불편한 문제 생생하게 묘사
한국문학 허리 세대로 자리 잡은 또래 남성 작가 3인이 동시에 신작소설을 펴냈다. 김종광, 이기호, 박형서가 그들이다. 이들은 모두 40대 후반이고 비슷한 시기(1998~2000년)에 등단해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소설은 저마다 다른 빛깔이다. 이번에는 마지막 농촌 서사를 걸출한 입담으로 담아내거나, 평범한 이들의 부끄러운 윤리를 짚어내고, 초고령화시대의 노인 혐오를 스릴러 형식으로 담아냈다. 내외 악조건 속에 고사해가는 한국문학 신뢰 회복에 이들의 분투가 어느 정도 기여할지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김종광, ‘놀러 가자고요’

명천 이문구(1941~2003)의 계보를 잇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의 입담가 김종광(47)이 8년 만에 펴낸 소설집이다. 충청도 ‘범골’ 사람들의 내력을 유머와 페이소스로 9편의 소설에 조근조근 담아낸다.

표제작 ‘놀러 가자고요’는 노인회장 ‘김사또’를 대신해 그의 마누라 ‘오지랖댁’이 관광버스 빌려 놀러가는 일에 대해 일일이 마을 사람들과 통화하는 내용으로 꾸려진다. 이 과정을 통해 마을 사람들의 다양한 속사정이 드러난다. 보청기를 끼었어도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이, 도망간 며느리 대신 손녀를 키우는 할머니의 손녀 자랑, 자식들이 속을 썩여 병원에 누워 있는 이, 전화를 받다가 서로 울게 되는 사연까지 다양하게 등장한다.
김종광

“네 말 듣고 있으니까 더 살고 싶다. 오지랖아, 나 정말 죽고 싶지 않다. 나 참 선량하게 살았다. 내가 왜 벌써 죽어야 하냐? 우냐? 울어도 시원치 않을 사람은 난데, 네가 왜 울어?”

‘범골 달인 열전’에는 다양한 달인들이 등장한다. 이앙기와 대결해 이길 정도로 모를 빠르게 잘 심어 호가 난 달인 ‘모심지’는 끝내 발달된 자동 이앙기는 당해내지 못하고 두 손을 들고 만다. 범골인들은 안타까워하면서 그가 “기계한테 진 게 아니고 나이한테 진 것”이라고 한숨을 쉰다.

이번 소설집에는 이밖에도 ‘장기호랑이’ ‘산후조리’ ‘범골사 해설’ ‘김사또’ ‘붓도랑 치기’ ‘만병통치욕조기’ ‘아홉 살 배기의 한숨’ 등이 수록됐다. 1998년 ‘문학동네’ 여름호로 등단한 이래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 ‘모내기 블루스’, 장편소설 ‘별의별’ ‘조선통신사’ 등을 펴내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김종광은 자신의 산문집 ‘사람을 공부하고 너를 생각한다’의 한 대목을 ‘작가의 말’로 인용했다.

“변명을 하자면, 내 부모의 인생이 기록되어야만 하는 귀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줄기차게 썼다. 내 부모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골에서 한평생 최선을 다한 농부이기에 기록되어야만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루하고 사소한 농민으로서의 삶을 경이롭고 기억할 만한 사건의 연속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 나는 아직 덜 썼다고 생각한다.”

◆이기호,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재치 넘치는 이야기꾼으로 각광받는 이기호(46)가 5년 만에 펴낸 신작 소설집이다.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7편의 단편들 제목에는 표제작처럼 모두 구체적인 이름이 등장한다.

이를테면 ‘최미진은 어디로’에서 최미진은 작중 실명으로 등장하는 소설가 이기호가 자신의 책에 사인해준 여성 이름이다. 이기호는 인터넷 중고나라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제임스 셔텨내려’가 내놓은 중고서적을 접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이기호/ 병맛 소설, 갈수록 더 한심해지는, 꼴에 저자 사인본(다섯 권 구매 시 무료 증정)’이라는 모욕적인 문구와 대면한다. 더 화가 나는 것은 또래의 작가 박형서에게는 ‘병맛이지만 나름 묵직한 한 방이 있는, 메타픽션 갑’이라는 찬사가 붙어 비교된다는 사실이다. 이기호가 구매자를 가장하여 결국 판매자를 만나는데, 알고 보니 헤어진 애인 최미진으로 인한 찌질한 복수 행위였다. 이기호는 “모욕을 당할까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는 삶”이 “서글프고, 부끄럽다”고 소설 속에서 고백한다.
이기호

‘나를 혐오하게 될 박창수에게’에 등장한 김숙희는 자신에게 헌신적인 남편이 ‘부끄러워서’ 살해했다. 이어지는 ‘오래전 김숙희’에 그 후속 이야기가 전개되거니와, 사람들 사이의 일상적인 교류조차 제대로 나눌 수 없는 비루한 리듬에 갇힌 ‘부끄러움’을 자학하듯 응징하고 스스로 파괴당하는 깊은 슬픔이 묵직하다.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한정희와 나’에서는 배려의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고 그 선을 넘지 못하는 평범한 이들의 찌질한 윤리를 파고든다. 이밖에도 용산 참사 당시 현장에 가지 못했던 이의 사정을 담은 ‘나정만씨의 살짝 아래로 굽은 붐’이나 제목 그대로 누구에게나 무심하게 친절해서 빚어지는 오류를 담은 표제작이 이번 소설집 목록이다. 이기호는 “윤리를 책으로, 소설로,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라고 묻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설이나 책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진실”이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박형서, ‘당신의 노후’

“연금이 저축해둔 돈 찾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생산인구 소득을 거둬 비생산인구들에게 나눠주는 거야. 요새 청년 세 명이 노인 일곱 명을 부양하고 있어. 청년들이 100만 원씩을 벌면 너희 늙은이들한테 쪽쪽 빨려서 집에는 대략 50만 원씩 가져간단 말이야. 그 돈으로 애인 만나 찻집에 가고 결혼을 하고 애도 낳아 기르고 월세도 내야 돼. 나머지 50만 원은 당신 같은 늙은이들한테 갖다 바치고 말이야.”

현대문학에서 ‘핀시리즈’로 출간한 박형서(46)의 ‘당신의 노후’에서 나이와 연금수령액이 많은 노인을 살해하는 ‘외곽 공무원’의 악담이다. 이 소설은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미래를 배경으로 연금공단이 재정적자를 방지하기 위해 죽어도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알리바이를 만들어 노인들을 살해하는 이야기를 축으로 삼고 있다. 이 일을 수행하던 공무원 ‘장길도’가 은퇴한 후 아내 ‘한수련’이 자신 몰래 연금을 부어 와 수급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 아내가 살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일견 황당한 줄거리이지만 이야기를 실감나게 꾸려나가는 작가의 솜씨가 한 호흡으로 끝까지 읽게 만든다. 장길도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외곽공무원의 이어지는 말.
박형서

“애먼 동료들 원망하지 마. 우리 쪽에서 한 게 아니야. 국민연금공단 적색 리스트에 오른 건 맞지만, 결국 우리보다 더 급한 건강보험공단에서 먼저 손을 썼대. 이봐, 잘못은 당신 와이프가 한 거라니까. 폐의 절반이 나자빠졌는데도 벌써 이게 얼마야, 30년 이상을 살아 있었잖아. 저쪽에서도 참을 만큼 참은 거지.”

자신 또한 많은 노인들을 제거했던 장길도는 “시간이 노인의 편이 아닌 것처럼 젊은이의 편도 아니다”면서 “시간은 결국 살아 있는 모두를 배신할 것”이라고 호소하지만, 그이도 결국 공무원의 손에 죽음을 맞는다. 극단적인 설정으로 향후 도래할 초고령화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소설인데,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어 일상의 틀을 깨고 문제를 직시하게 만드는 문학작품의 소명을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거릴 만하다. 무엇보다 노년의 다양한 최후를, ‘공무원’들이 죽이지 않았어도 실제로 그렇게 끝을 맺었을 법한 우리 주변의 노후 죽음을 생생하게 묘사해 이 소설이 결코 허구로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소름이 돋을 수도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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