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18년의 현실은 어떨까. “막대한 국방비를 투입하고도 우리가 북한 군사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연합 방위능력에 의지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던 문재인 대통령의 지난해 8월 28일 국방부 업무보고 발언을 듣고 노 전 대통령의 12년 전 발언이 떠올랐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육군 구룡 다연장로켓이 가상 표적을 향해 발사되고 있다. 육군 제공 |
노 전 대통령 말처럼 우리 군인들이 국방비를 떡 사먹는데 다 썼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군은 수십년 동안 북한의 도발에 대비한 전력증강을 지속해왔다. 그럼에도 군이 북한보다 우세한 군사력을 확보했다고 장담하지 못하는 이유는 예산 지출과 정책 기획 방식 때문이다.
군에서는 예산 지출 및 정책 기획 과정에서 위협기반(threat based)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위협기반 방식은 내가 상대해야 할 적을 설정하고, 적의 무기체계와 군 구조 등을 파악해 그보다 우수한 군대를 만드는 개념이다. 주기적으로 전쟁 시나리오를 점검하면서 새롭게 입수한 정보를 반영해 적의 위협 요소를 다시 식별하고, 새로운 위협이 등장하면 그에 대응하는 전력증강 사업을 실시한다. 우리 군도 키 리졸브(KR)를 비롯한 가상 워게임을 통해 북한의 군사적 위협 수준을 측정하고 전력 증강 요소 식별에 활용한다.
위협기반 방식은 군 당국자들이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적과의 1:1 비교를 통해 보완해야 한다고 판단되는 분야에 집중하면 그만이다. 투자와 정책 기획 방향을 설정하는 기준이 적의 위협뿐이라 국민들에게 투자의 당위성을 설명하기도 쉽다. 적군에 비해 아군의 전력이 열세이므로 군사력을 증강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지 않을 국민은 없기 때문이다.
육군 비호 박합대공화기체계가 공중의 표적을 형해 기관포를 발사하고 있다. 육군 제공 |
적의 위협에 대해 정확히 판단하지 못할 경우 시간과 예산만 낭비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러시아가 1970년대 배치한 미그-25 전투기는 미국의 XB-70 전략폭격기를 저지하기 위해 개발된 항공기였다. 하지만 미국이 XB-70 프로그램을 취소하면서 미그-25의 가장 큰 임무는 사라져버렸다.
적의 위협이 변화무쌍하게 바뀌면 아군의 전력 증강 방향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이 커지자 군은 한국형 3축 체계(킬 체인,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 대량응징보복)를 구축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하지만 한국형 3축 체계가 제대로 구축되기도 전에 북한 비핵화 가능성이 커지자 10조원을 투입, 북한 핵과 미사일 위협을 차단하겠다는 군의 3축 체계는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도에서 해병대 서북도서방위사령부 주관으로 2017년 9월 7일 계속된 서북도서방어훈련에서 해병대 6여단 장병들이 적 침투상황을 가정해 훈련하며 상륙돌격장갑차에서 하차해 이동하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
위협에 대응하는 수동적 방식의 단점이 부각되자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능력기반(capabilities based) 방식이다. 국가 안보에 필요한 군사적 능력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그에 걸맞는 전력증강 계획을 경제적 여건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추진하는 능력기반 개념은 2000년대 초 미군의 혁신을 부르짖던 도널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당시 미군은 냉전 종식으로 러시아의 위협이 크게 줄어들자 다양한 위협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할 필요성을 느꼈다.
능력기반 방식은 어떤 형태의 위협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월드컵에 출전하는 축구 국가대표팀은 조 추첨 전까지는 조별예선에서 상대할 국가를 알 수 없다. 따라서 선수의 체력과 개인기, 팀 전술 등을 연마하다가 조별예선 상대국가가 정해지면 그에 맞는 능력을 선별해 대응한다.
능력기반 방식의 전력증강도 이와 같다. 국가 안보에 필요한 능력을 확보하면서 유연성을 강화하는데 초점을 맞추므로 예상치 못한 기습을 당할 우려가 낮다. 반면 사회적 변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미래 국방에 필요한 능력이 무엇인지 파악하는게 쉽지 않다는 단점도 있다.
국방개혁 2.0을 통해 대대적인 혁신을 추진하는 군 당국의 입장에서 능력에 기반한 예산 투자와 정책 기획 수립을 국방정책에 반영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의 합의를 바탕으로 북한 비핵화와 6.25 전쟁 종전선언, 평화협정 체결이 이뤄지면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크게 낮아진다. 60여년 동안 휴전선 너머에 자리잡고 있던 주적(主敵)이 사라지는 셈이다. ‘북한은 남침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는 전제 하에 수십년간 지속된 위협기반 예산 투자나 정책기획 방식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민주주의 의식 강화도 기존 방식을 사용할 수 없게 하는 요인이다. 북한 위협이 컸을 때는 국가안보를 위해 소수의 엘리트들이 전력증강 계획을 수립해 추진해도 국민들이 용인했지만, 한반도에 평화가 찾아오면 군사력 건설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 민주주의에 기반해 국방과 관련된 이해당사자들-기획재정부, 행정안전부, 일반 국민 등-간의 합의에 의한 전력 투자와 정책 추진이 불가피하다.
해군 윤영하급 유도탄고속함이 훈련을 위해 이동하고 있다. 해군 제공 |
현재 국방부는 문 대통령의 공약을 반영한 국방개혁 2.0의 최종 점검을 진행하고 있다. 장군 정원을 70~80여명 줄이고 국방부 직할부대를 조정하는 등의 개혁 과제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군의 본질이 무엇인가. 국토와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국토와 국민을 지킬 수 있는지를 고민해 국방개혁 2.0에 반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감소하는 상황을 잘 이용해 군의 본질부터 뒤엎는 혁신을 하지 못할 경우 우리 군은 표범같은 군대가 아닌, 공룡같이 둔하고 거대한 ‘돈 먹는 군대’로만 남게 될 것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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