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아름답고 위태로운 감정은 사라지고 우정이라는 안전한 감정만 존재하는 평등하고 밋밋한 세계. 나는 알게 됐다. 왜 유토의 생물들이 그토록 단단한 슬픔을 지니고 있는지, 마음 깊은 곳에 암석과도 같은 허무를 지니고 사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존재의 위협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무의미하게 남겨질 거라는 예감은 어떤 초월적 고통을 준다. 절망 한가운데서 마모되지 않는 껍데기만 텅 빈 육체로 남겨질 것이다.”
간절히 그리운 이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위무와 애도의 서사를 시적인 문장으로 음각한 소설가 정용준. 그는 “내가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소설이 나를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어떤 새벽엔 근사한 옛날 사람에게 긴 편지를 받았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고 썼다. 문학동네 제공 |
토니오는 유토에서 흰수염고래의 도움을 받아 50년 만에 지상으로 돌아왔다. 그이 또한 지상에 남겨두고 온 연인 콘수엘라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해갈할 수 없어 죽어서도 다시 죽으려는 우토행을 감행했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대서양 화산섬 마데이라 해변에 고래 수십 마리가 올라와 죽었는데, 그중 거대한 흰수염고래 입에서 토해져 나온 사내가 토니오였다. 미국인 화산학자 시몬이 그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보호한다. 시몬과 같이 연구하던 앨런이라는 여성은 잠수 중 실종됐는데 그가 구한 기이한 토니오라는 생명이 바다 밑에 들어가 그녀의 목걸이까지 제시하며 죽은 연인의 목소리를 전한다. 실종된 연인 때문에 폐인처럼 살았던 시몬은 비로소 토니오라는 존재를 신뢰하기 시작한다.
토니오는 말한다. “떠나는 자도 남겨진 자도 같은 이유로 두려워하네.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 새로운 기억을 만들 수 없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야. 죽음 저 너머로 떠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들을 가슴속에 데리고 간다네.” 흰수염고래 입에서 그를 발견했던 시몬은 말한다. “나는 토니오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릅니다. 내가 아는 건 그가 이곳에 돌아오기 위해 시간을 건너고 바다를 건넜다는 겁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정용준이 말했다. “이 소설을 생각하고 쓰고 고치는 동안 내게도 세계에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바다에 빠진 사람들과 자기가 미워 스스로 죽은 자, 불과 얼음 속을 걷는 자들과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이들. …피곤하고 피로하여 깊은 물속을 떠도는 물그림자 같은 것이 되는 것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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