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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문턱서도 요절한 애제자 가족 걱정한 ‘의리파’

입력 : 2018-05-08 08:00:00 수정 : 2018-05-07 21: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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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73〉 먼저 떠난 제자 가슴에 묻은 송시열 곧 스승의 날이다. 그동안 나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께 마음은 있어도 차마 쑥스러워하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날일 텐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교사들에겐 영 부담스러운 날이 되어 버렸다. 군사부일체를 당연하게 여기던 조선시대에는 스승과 제자의 정이 실제 어떠했는지 불현듯 궁금한 생각이 들어 한글편지를 뒤적이다 우암 송시열이 쓴 한글편지 두 통을 발견했다.

송시열 초상 우암 송시열은 ‘의리’라는 이념으로 견고하게 포장되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화화되어 인간적인 모습을 알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다. 이런 점에서 그가 쓴 한글편지는 ‘인간 송시열’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어 흥미로운 자료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신화에 묻혀 버린 인간 송시열의 흔적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하고 기록을 통해서만 만날 수밖에 없는 역사상의 인물 중에는 포장이 너무 견고해서 그 인물의 참모습을 도통 가늠해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중 한 명이 우암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추종자들에 의해 신화가 되어 버린 인물이다. 이것은 송시열 개인적으로는 명예스러운 일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모습이 신화 속에 묻혀 버려야 하는 아픔이기도 하다. 송시열은 조선시대 ‘의리’의 대표적인 인물로 분류된다. 그러나 송시열의 의리는 추종자들에게는 존숭의 이유가 되었지만, 반대파에게는 국익과 민생보다 사적 인연이나 학연을 더 중시한 인물이라는 비판을 받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추종자들이나 반대파들의 기록에서 의리로 대표되는 송시열의 인간적 모습을 찾아내기는 힘들다. 송시열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한글편지들이 남아 있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반가운 일이다.

송시열의 한글편지 중에는 제자였던 정보연의 아내 여흥민씨에게 쓴 것들이 있다. 조선시대에 친인척 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녀 간에 편지를 주고받은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조선 예학의 대가 송시열이 한글로 여흥민씨에게 편지를 쓴 것은 그만큼 절실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가슴에 묻은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

정보연(鄭普演·1637∼1660)은 송시열의 애제자였다. 어려서 송시열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으며 스승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24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송시열은 사랑하는 제자의 죽음을 애달파하며 석 달 동안 흰 띠를 매었다고 한다. 그 후 송시열은 정보연이 남긴 아내와 아들을 가족처럼 돌보았고, 특히 아들의 교육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며 먼저 간 제자를 보듯 사랑을 쏟았다. 그리고 정보연의 아내 여흥민씨에게 편지를 써서 가사를 돕기도 하였는데 그때 쓴 한글편지가 남아 있다.

송시열은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예송에서 그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정월에 덕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 거제 등지의 유배지를 떠돌았다. 유배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처벌 주장이 일어나 생명에 위협을 받으며 송시열의 목숨은 백척간두에 놓여 있었다. 그는 가시울타리가 쳐진 유배지에서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음을 알고, 한글편지 한 통을 여흥민씨에게 보낸다.

여흥민씨에 보낸 한글편지 송시열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제자 정보연의 아내 여흥민씨에게 보낸 한글편지. 남편을 잃은 여흥민씨를 걱정하고, 제자 아들의 교육까지 신경 쓰는 송시열이 마음이 절절하게 담겨 있다.
“옛날 주자(朱子)라 하는 성현네께서 서로 친한 부인네께 친척 아니어도 편지하시던 일이 있었는데, 죄인이 그 예에 의거하여 한번 편지로 아뢰고자 하되 지금 시절에 없는 일이매 주저하였습니다.”

주희의 한마디 한마디를 삶의 전범으로 삼은 조선 예학의 대가답게 편지의 첫머리는 ‘주자’로 시작한다. 친인척 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녀 간에 편지를 주고받는 것이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라 먼저 주자의 예에 의거하여 편지를 하게 된 정당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송시열이 주자까지 들먹이며 여흥민씨에게 힘들게 편지를 보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당시 송시열의 목숨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을 간파한 송시열은 마치 마지막 유서와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여흥민씨에게 어렵게 편지 한 통을 보낸 것이다.

◆제자 아들의 교육까지 걱정한 스승의 애틋함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일 혼사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에 대해 여흥민씨에게 사죄하고 있다. 후에 집안끼리 다시 인연을 맺길 바라며 자식들에게 이를 유언으로 남기겠다고 하였다.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정보연 가문과 인연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다음으로는 사랑하는 제자 정보연의 산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산소는 제천에 쓰는 것이 좋을 것이며, 화려히 하지 말고 표석과 지석만을 쓸 것을 당부했다. 이때 정보연의 산소는 태백오현(太白五賢) 중의 한 사람이었던 그의 부친 정양의 산소가 있는 봉화에 있었다. 생전의 정보연을 가장 잘 아는 스승으로서 그의 마음을 헤아려 산소 장식을 화려히 하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그리고 정보연의 아들 정천이 봉화까지 다니면서 고생할 일을 마음 아파하며 정보연의 산소를 제천으로 이장할 것을 권했다.

마지막으로 정천의 교육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시시로 글 읽기와 행실 닦을 일을 게을리하지 말게 하라는 당부이다. 사실 송시열과 정천의 관계는 그와 정보연의 관계만큼이나 각별했다. 송시열은 정보연이 죽고 나서도 정천의 교육문제 등을 계속해서 살뜰하게 챙겨주었고 정천도 송시열을 충심으로 모셨다.

이현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죽음의 문턱에서 전한 위로

송시열이 여흥민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는 숙종13년(1687) 그의 나이 81세로 사망하기 2년 전에 썼다. 이때는 이미 기력이 쇠잔하여 붓조차 들기 힘들어진 상황이 된 듯하다. 편지 본문 중에 “며느리로 하여금 불러 적게 하며 지극히 황공해 합니다”라고 하여 며느리에게 대필을 하게 된 정황이 나와 있다. 이 편지는 송시열이 유배에서 풀려난 후 향리에 머물면서 썼다.

이 편지를 쓴 해인 1687년 2월에는 윤증과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해였다. 윤증은 원래 송시열의 제자였다. 한때 제자였던 윤증과의 갈등은 더욱 사랑하던 제자 정보연을 그리워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 편지는 여흥민씨가 거듭된 혈육의 상사(喪事)를 당하자 가슴 아파하여 이를 위로해 주기 위하여 쓴 것이다. 이때 상을 당한 부원군 민유중은 바로 인현왕후의 아버지이다. 민유중과 여흥민씨는 남매간이었으므로 여흥민씨는 바로 인현왕후의 고모가 되는 셈이다.

인현왕후는 20세가 될 때까지 왕자는 물론 공주도 출산하지 못했다. 그즈음에 궁녀 출신의 여인 장희빈이 등장해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해에 부원군 민유중이 사망했고, 장옥정을 반대하던 숙종의 친모 명성왕후도 세상을 떠나 장옥정을 향한 숙종의 총애가 더욱 굳건해져 가는 시점이었다. 인현왕후의 흔들리는 위상 속에서 민유중의 죽음은 여흥민씨에게뿐만 아니라 여흥민씨 가문 전체에 큰 슬픔이 아닐 수 없었다. 송시열은 여흥민씨가 거듭된 혈육의 죽음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아침 저녁 제사를 친히 지내고, 곡읍(哭泣)을 그칠 사이 없이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송시열은 여흥민씨의 건강이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송시열은 부디 슬픔을 이기고 본댁으로 돌아와 대의를 생각하라고 당부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하다 혹 몸이라도 잘못되면 죽은 정보연을 무슨 면목으로 대할까 한탄하고 있다.

민유중이 사망하고 한 해 뒤에 장옥정은 아들을 낳았고, 숙종은 태어난 지 3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아이를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했다. 송시열은 원자 정호를 반대하며, 인현왕후가 득남하기를 기다리자고 하였다. 송시열이 올린 상소에 숙종은 크게 화를 냈고, 결국 이 일이 도화선이 되어 서인 정권은 무너지고 만다. 송시열은 여든세 살이라는 고령의 몸을 이끌고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숙종 15년 5월에 인현왕후는 폐출되었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그해 유월에 송시열은 제주도 유배지를 떠나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길, 정읍에서 사약을 마시고 사사되었다. 결국 송시열이 여흥민씨에게 보낸 이 마지막 편지는 향후 그녀와 그녀의 친정에서 겪게 될 고난을 예견하고, 송시열이 생전 마지막으로 남긴 위로였으며 가슴에 묻은 사랑하는 제자 정보연과의 마지막 의리가 되었다.

이현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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