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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학개론] (8) 사랑이라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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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28 13:00:00 수정 : 2018-05-04 18: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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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희대 자연사박물관

이사 온 지 5년이 지났지만 예전에 살던 동네가 문득문득 떠오를 때가 있다. 요즘처럼 라일락(사진)이 사방팔방 향기를 뿜어내는 계절이면 특히 더하다. 지은 지 30년이 훌쩍 넘은 아파트에는 유달리 오래된 나무가 많았다. 벚꽃과 라일락 등 봄에 피는 꽃을 품은 나무가 즐비했다. 어린아이가 두 팔을 벌려서 안고도 남는 커다란 나무 아래는 낮시간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고, 저녁쯤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랑방이었다. 특히 한여름이나 햇살이 좋은 날에는 과일이며 먹을 것을 가지고 나와 담소를 나누는 이웃을 자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라일락 나무 아래에는 관리사무소에서 대충 만들어 놓은 정자가 하나 있었다. 말이 정자지 나무판을 얼기설기 짜놓고, 그 위에 노란색 장판을 대충 덮어놓은 것이다. 볼품은 없지만 그만한 쉼터도 없었다.

정자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있는 할머니 한분이 있었다. 헤어스타일이 백발에 가깝지만 단아한 차림이 언뜻 봐도 미인이었다. 봄이면 나물을 다듬기도 하고, 여름이면 뜨개나 수세미 뜨기 등 손으로 연신 무언가를 했다. 손은 계속 움직이지만 할머니의 시선은 항상 먼 곳을 향해 정지해 있었다. 그 눈길이 닿는 곳에는 바로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한쪽 다리와 팔이 몹시 불편해보이는 할아버지는 늘 지팡이를 짚고 아파트 주위를 아주 천천히 걸었다. 한바퀴를 돌아 할아버지가 시야에 들어오면 할머니는 말을 걸었다.

“걸을 만해요?“

“정문에 과일 트럭 아직도 있어요?”

“물 좀 드릴까요?”

“힘들지 않아요?”

“땀 좀 닦아드려요?”

이웃의 말을 들으니 얼마 전 뇌출혈로 할아버지가 쓰러졌다고 한다. 몇달간 병원 신세를 진 뒤 자식은 요양원으로 할아버지를 모시려고 했으나 한사코 할머니가 함께 지내겠다 했다고 한다. 다행히 평소 운동과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할아버지는 이렇게 날마다 할머니의 코치(?)를 받으며 걷기와 운동, 식이요법을 병행한다고 한다.

며칠 전 그쪽 동네에 일이 있어서 그 아파트에 잠시 들렀다.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을 보니 문득 그분들이 떠올랐다. 근처 사는 지인에게 그분들의 안부를 물으니 할아버지는 많이 회복돼 이제는 지팡이나 보행기가 없어도 걷는다고 한다.

다행이다. 지하철을 타면 가끔 노년의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곤 한다. 지하철 카드를 챙겨주고 길눈에 어두운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이 한눈에 봐도 애틋함이 묻어난다.

결혼식 주례사 중에 꼭 이런 말이 있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로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사랑의 맹세가 쉬워지는 요즘이다. 프러포즈 이벤트나 100일 여행, 커플 반지 만들기 등등 사랑 관련 각종 마케팅은 차고 넘친다. 이런 이벤트 하나 하지 않으면 마치 ‘사랑’하는 게 아닌 듯한 느낌마저 받는다.

그러나 사랑은 김광석의 노래처럼 ‘하얗게 세운 많은 밤들’이 ‘기억 속으로 묻혀도 함께 나누던 많은 이야기(시간)가 가슴에 남아’만 있다면 할 수 있지 않을까. 노년을 함께 보내며 수없이 많은 세월을 함께 한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처럼.

글=이윤영 방송작가  instagram.com/bookwriter7, blog.naver.com/rosa0509, bruch.co.kr/@rosa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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