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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역사] (4월16∼22일) 반둥에서 울린 ‘아아(亞阿)’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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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4-15 20:55:46 수정 : 2018-04-15 20:5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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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4월18일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열린 아시아·아프리카(AA) 정상회의를 보는 감회는 여러 갈래였을 것이다.

‘드디어’라는 말이 떠오르는 것도 그 하나다. 백인들의 제국주의에 숨도 못 쉬던 아아(亞阿)대륙의 황인종과 흑인종들이 수백 년 만에 드디어 합창하듯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날 개막연설에서 수카르노 인도네시아 대통령이 “나의 가슴은 감격으로 벅차오르고 있다. … 우리는 식민주의에 대한 공통된 혐오감으로 단합한 것이다”고 말한 것이 이 회의의 성격을 말해준다.

이 회의에는 6개 아프리카 국가와 23개 아시아 국가가 참석했다. ‘식민지 쟁탈전’이라는 2차 대전이 끝난 지 10년 만인 당시는 냉전이 한창이었다.

바로 그것이 AA국가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백인 세계가 격렬한 동서 대결로 치닫자 광범위한 허점이 드러나게 됐고 그 틈새를 AA세력이 파고든 것이다.

따라서 이 회의에는 AA국가라도 냉전의 바람이 거센 남북한과 자유중국(대만)은 초대받지 못했다. 지역갈등이 심한 이스라엘 및 인종차별이 심한 남아프리카공화국도 마찬가지였다.

이 회의는 ‘반둥10원칙’(세계 평화와 협력의 추진에 관한 선언)을 발표한 외에 별다른 성과도 없이 끝나고 말았다.

1964년 알제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AA 2차 회의도 무산됐다. 하지만 AA지역 민중들이 한목소리를 낸 반둥회의 자체가 유야무야된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61년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비동맹정상회의는 반둥회의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 세력권을 제1세계, 소련 등 공산권을 제2세계로 보고 스스로를 제3세계로 규정하기도 했다.

그러다 공산권의 해체로 제3세계라는 용어는 퇴색했다. 하지만 그런 용어와 상관없이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제3신분에서 따온 ‘제3세계’의 존재 그 자체는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제 국제사회의 제3신분으로서 세계사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됐다.

양평(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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