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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넓어지는 광화문광장 … 그곳의 역사도 되살린다

입력 : 2018-04-13 10:00:00 수정 : 2018-04-12 21:2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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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앞 대로, 육조거리로 불려/의정부 터 발굴·건물 복원도 검토/노비문서 관리했던 장예원 표석/백성을 버린 왕에 대한 분노 전해/일제강점기 훼손된 동·서십자각/재원문제 넘어 이번엔 복원될까 ‘시민광장+역사광장’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구상하는 광화문광장의 모습이다. 지난 10일 발표된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기본계획안’대로라면 2021년 지금보다 4배 가까이 커지고, 시민 접근도가 향상된 광화문광장의 역사성이 한층 짙어진다. 광장의 미래에 역사가 한층 강조되는 것은 그것에 깃든 과거의 무게가 막중하기 때문이다. 경복궁과 그것의 정문인 광화문만으로도 역사성은 이미 또렷하지만 조금만 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조선왕조 500년을 관통하는 역사를 어느 곳보다 밀도있게 그려낼 수 있다. 

조선의 최고관부였던 의정부 터 발굴 현장 모습.
◆초기-조선의 최고 관부 의정부

광화문 앞의 대로를 ‘육조거리’라 불렀던 건 이곳에 조선을 경영했던 중앙행정관청이 밀집해 있었기 때문이다. 의정부는 육조거리에 위치한 최고의 관부였다. 건국 초기인 1400년(정종 2년)에 설치된 의정부는 나중에 비변사에 실권을 넘기긴 했지만 1907년 폐지 때까지 최고의 정치·행정기구로 간주됐다.

서울시는 지금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옆의 공원, 주차장으로 활용되었던 의정부 터의 발굴을 2016년 시작했다. 정부서울청사와 주한 미국대사관 등 대형 건물이 들어선 육조거리의 다른 곳과 달리 의정부 터는 그동안 대규모 신축공사가 거의 없어 지하 유구(遺構)의 보존 상태가 상대적으로 양호할 것으로 판단했다. 발굴과 함께 의정부 건물의 복원까지 염두에 두었으나 광화문광장을 새롭게 꾸미는 계획이 발표됨에 따라 다소 유동적인 상황이 됐다. 

궐 담장과 연결되어 있던 동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되면서 지금은 도로 한중간에 고립되어 있다. 서십자각은 완전히 사라져 이제는 표석(왼쪽 작은사진)만 남아 있다. 동·서십자각은 경복궁의 주요 요소로서 광화문 일대의 역사성 회복을 위해 복원이 추진되었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중기-민중의 분노를 전하는 장예원 표석

서울시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장소, 건물터 등을 표시한 316개의 표석을 시내 곳곳에 세웠는데, 광화문광장 일대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노비 문서의 관리 등을 담당하던 관서인 장예원 터 표석이다. 이순신 장군상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사선으로 마주보고 서 있는 장예원 표석은 임진왜란 당시의 참상과 전란의 와중에도 국가로부터 한 치의 보호도 받지 못했던 최하층 민중의 분노를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 한양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질 위기에 처하자 선조와 신하들은 백성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갔고, 어가가 한양을 떠난 얼마 후 도성 안에 큰 불길이 치솟았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불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불을 낸 ‘난민’이 처음 노린 곳이 장예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장예원에 보관된 노비문서를 없애려 했다. 백성을 버린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부, 그들을 억압했던 사회질서에 대한 분노가 거세게 터져 나온 것이다. 소설가 김별아는 ‘도시를 걷는 시간’에서 장예원 터 표석을 소개하며 이렇게 적었다.

“이곳을 찾아 살피며 기억해야 할 보다 중요한 것은…노비들의 한과 울분이다.…전쟁이 터져 나라가 백척간두에 처한 지경에도 물밀어오는 외적에 대항하기는커녕 왕궁에 불을 질렀던 하층 계급의 분노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되새기게 한다.” 

◆후기-광화문 역사성 복원의 핵심 십자각

문화재청과 서울시가 발표한 ‘새로운 광화문광장 조성 기본계획안’을 보면 광화문의 역사성을 또렷이 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월대 복원은 이런 구상의 핵심이다. 그런데 다소 애매해(?) 보이는 지점이 있는데 광화문을 중심에 두고 양쪽 끝에 서 있던 동·서십자각의 복원이 그것이다.

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사라졌다. 일제는 자신들의 지배 성과를 선전하기 위한 대규모 박람회를 조선후기에 중건된 경복궁에서 여러 차례 개최하고, 지배기구인 총독부청사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관람객의 이동 편의, 총독부청사터 확보 등을 이유로 십자각을 훼손했다. 동십자각이 궁궐 담장과 분리돼 고립되고, 서십자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이제는 표석으로 남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궁궐’이라는 명칭에서 ‘궐’은 “궁 앞 좌우에 설치되었던 망루와 같은 건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동·서십자각이 있어 경복궁이 궁궐의 제도를 따랐다는 해석이 있을 정도로 십자각의 역사성은 월대 못지않다. 이 때문에 1990년 후반 본격화된 경복궁 복원 계획에서 십자각을 되살리는 것은 항상 주요한 관심사 중 하나였다. 그러나 십자각 복원은 광화문 일대의 도로 선형 변경, 토지보상에 따른 막대한 재원의 필요 등으로 번번이 연기됐다. 1차 경복궁 복원 계획에서 십자각 복원은 2003~2009년 작업의 핵심과제로 제시되었으나 현실적인 문제로 밀렸다. 2차 계획에서도 복원 대상 중 유일하게 “시급히 시행해야” 하는 과제로 정해져 2030년이 시한으로 정해졌지만, 이것도 2045년까지로 바뀌었다.

새 광화문광장 조성 계획에서 십자각 복원은 검토의 대상이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조성 계획에 따라 도로 선형이 바뀌면 십자각 복원에 좀 더 유리한 상황이 되기는 한다”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와 서울시와의 협의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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