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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인듯 아닌듯… 한지 프린트의 ‘깊은맛’

입력 : 2018-03-13 20:39:43 수정 : 2018-03-13 20:3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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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사진계가 주목하는 이정진 작가
어느 날 명상수련을 마친 작가는 붙박이장에 놓여 있던 토기가 평소와 달리 자신에게 커다랗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붙박이장에 있는 다른 사물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불현듯 카메라를 들었고, 사진에서 토기의 그림자를 지우자 토기가 공간을 부유했다. 세계 사진계가 주목하는 이정진(57·사진) 작가의 ‘사물’ 시리즈가 시작된 계기다.

작품들은 사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회화적이다. 한지 위에 그림자도 없이 부유하는 익숙한 사물들은 원래 우리가 알던 그것이 아닌 것 같다. 의도적 여백은 작품 앞에서 한없이 명상에 빠져들게 한다.

대상 너머의 ‘그 어떤’ 세계를 사진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이정진 작가. 자연스레 그의 작품이 사람들에게 카메라로 쓴 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사진은 ‘사물’시리즈.
“1990년대 초 광활한 미 대륙을 여행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또 했어요. 사막에서 비현실적인 공간을 감응하게 됐지요. 황량한 지평 위에서 바위와 덤불들이 극적으로 거대하게 다가왔어요. ‘미국의 사막’ 시리즈는 그렇게 탄생됐습니다.”

그의 스승이기도 한 현대사진의 거장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94)는 “인간이라는 야수가 배제된 풍경”이라고 평했다. 작가가 냉철한 눈으로 그곳에 존재하는 고독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라고 했다. 그의 작업 태도는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의 말을 떠올려 주기에 충분하다. 들뢰즈는 모든 곳에는 신이 지나간다고 말했다. 진정한 작가적 태도는 신이 왔다가 가는 그 순간을 명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사물과 사막에서 작가가 본 것들은 어쪄면 신의 흔적일지 모른다.

‘파고다’ 시리즈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같은 석탑사진을 위아래로 거울상처럼 붙이고 탑 주변의 요소들을 남김없이 지웠다. 텅 빈 배경이 시간을 초월한 듯한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내 신의 지나감(깨달음)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파고다’시리즈
“풍경 속에 투영된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는 물아일체의 경지로 이해해도 됩니다. 제 작업은 시간성과 공간성에서 비켜나 형이상학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그는 신의 흔적들을 구현하기 위해 독특한 인화방식을 고집하고 있다. 대상을 흑백 필름으로 찍은 뒤, 일반 인화지 대신 감광 유제를 큼지막한 붓으로 바른 한지에 인화하는 방식이다.

“컬러와 매끈한 인화지는 직선적이고 단순하지만, 흑백과 한지 인화는 미묘한 뉘앙스를 전달하기에 매우 적합한 깊은 맛이 있습니다.”

그의 전시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오는 7월 1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기획에는 특별히 유럽의 유수 사진기관인 스위스 빈터투어 사진미술관도 참여해 작가의 글로벌한 위상을 짐작케 해줬다.

빈터투어 사진미술관의 토머스 실리그 큐레이터는 이정진의 아날로그 프린트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고 평했다. 현대인은 디지털 매체가 쏟아내는 수많은 ‘평평한’ 이미지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질감이라든가 물질성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정진의 사진이 세계 사진계에서 주목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편완식 객원미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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