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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은
오래 남는 눈


강영은


뒤꼍이 없었다면, 돌담을 뛰어넘는 사춘기가 없었으리라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우는 어린 내가 없었으리라 맵찬 종아리로 서성이는 그 소리를 붙들어 맬 뒷담이 없었으리라 어린 시누대,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리라 눈꽃 피워내는 대나무처럼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이 없었으리라 아마도 나는 그늘을 갖지 못했으리라 한 남자의 뒤꼍이 되는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으리라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을 알지 못했으리라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을 알지 못했으리라 내 마음속 뒤꼍은 더욱 알지 못했으리라.

원은희

집 뒤, 마당 구석인 뒤꼍은 시인의 비밀장소인 나만의 방이다.

시인은 사춘기를 맞아 그곳을 자주 찾는다. 나만의 방에서 콩당콩당 뛰는 가슴을 쓸어안은 채 쪼그리고 앉아 울기도 하고, 어린 산죽 나무에 싸락싸락 눈발 듣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눈꽃 피워내는 대나무처럼 소리 없이 눈 뜨는 푸른 밤을 보기도 했다.

시인에게 뒤꼍이 없었다면 세상의 서늘하고 깊은 그늘까지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제 몸의 어둠을 미는 저녁의 뒷모습과 내 마음속 뒤꼍은 더욱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당나라의 고승 황벽 선사의 시구처럼 “不是一番 寒徹骨 爭得梅花 撲鼻香”(뼈를 깎는 추위를 한 번도 겪지 않았던들,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겠는가)라는 말처럼 혹독한 고통 치르지 않고 향기로운 삶을 얻을 수 없듯이, 봄은 겨울의 시련과 고난을 겪은 후에 찾아온다.

봄이 와도 녹지 않는 첫사랑처럼 오래 남는 눈을 간직한 시인의 방은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겪은 후에 한 사람을 사랑하는 웅숭깊은 뒤꼍으로 남는다.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온 우주를 사랑하는 일이다.

올해는 내 마음속 뒤꼍에 어린 시누대를 심어봐야겠다.

박미산 시인·서울디지털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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