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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의역사 - 2월12~18일] ‘마지막 황제’ 뒤에 홍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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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8-02-12 00:14:03 수정 : 2018-02-12 00: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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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2월12일 청나라가 멸망해 선통제(宣統帝)가 물러난다.

그래서 그는 성을 제외하고 ‘푸이(溥儀)’라는 본명으로 살게 됐으나 그러고도 ‘마지막 황제’가 되지 못해 자신은 물론 중국이 고난을 겪는다.

그의 뒤에는 청 말의 실권을 쥔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있었고 그는 ‘중화제국(中華帝國)’을 ‘건국’해 홍헌제(洪憲帝)가 되기도 했다.

실은 푸이를 성급히 내몬 것도 위안스카이의 그런 야심의 소산이었다. 그는 신해혁명의 상황에서 쑨원(孫文)의 혁명세력과 청 황실을 중재하는 척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사악한 거간꾼이었다.

위안스카이는 무능한 청나라 황실은 물론 의기는 높아도 군사력이 뒷받침하지 못하는 혁명세력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오쩌둥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말하기 오래전에 이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황실에는 혁명세력이 엄청나다고 위협해 선통제가 서둘러 퇴위하도록 하고, 혁명세력에게는 군벌들이 벼르고 있다고 겁을 주었다.

푸이가 계속 자금성에서 거처하게 된 것도 그런 바탕에서였다. 위안스카이로서는 청의 세력이 잔존해 있음을 보여주는 한편으로 자금성 예산을 착복하기도 했으니 일거양득이었다.

너무 약아서 어리석은 위안스카이는 1916년 홍헌제로 제대로 등극도 못하고 그 후유증으로 죽고 말았으나 푸이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924년에 베이징을 석권한 군벌 평위샹(馮玉祥)은 그를 내쫓았다.

푸이는 아버지인 순친왕에게 의탁했으나 그마저도 생명의 위협을 받아 이듬해 일본 공사관을 거쳐 톈진의 일본 조계로 피신해야 했다.

중국이 버린 푸이를 일본이 만주국 황제로 써먹은 바람에 그는 소련과 중국의 감옥 맛을 보아야 했다.

푸이는 1959년 사면돼 베이징 식물원의 정원사가 됨으로써 평생 처음으로 ‘자유’를 맛본 셈이다.

양평(언론인)

△1912년 2월12일 청나라 멸망으로 중화민국 출범

△1809년 2월12일 미국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탄생

△1809년 2월12일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 탄생

△1961년 2월13일 민족일보 창간

△1766년 2월14일 영국 인구통계학자 토머스 맬서스 탄생

△1894년 2월15일 동학혁명 발발

△1898년 2월15일 아바나항구서 미 군함 침몰(미·서 전쟁의 계기)

△624년 2월17일 중국 유일의 여제 측천무후 탄생

△2008년 2월17일 코소보 독립선언

△1951년 2월18일 네팔, 영국으로부터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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