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 소녀를 완벽한 아내로… 진보 지식인의 ‘엽기적 실험’

18세기 英 작가이자 인권운동가 / 그릇된 여성관에 수차례 파혼 / 고아 소녀 데려와 직접 교육시켜 / 자신 이상형으로 만들기 시도 / 당시 남성 지식인의 위선 폭로

웬디 무어 지음/이진옥 옮김/글항아리

완벽한 아내 만들기/웬디 무어 지음/이진옥 옮김/글항아리

그리스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평소 문란한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을 형상화한 조각상을 만들고는 사랑에 빠졌다. 피그말리온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것을 간청했다. 그의 소원은 이뤄졌고 피그말리온은 생명을 얻은 조각상과 결혼했다.

그리스 신화 속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다. 18세기 영국에는 피그말리온 신화를 재현하려 한 남자가 있었다. 영국의 시인이자 반노예제 운동가, 아동도서 작가였던 토머스 데이(1748∼1789)다. 그릇된 여성관을 가지고 있던 데이는 고아원에서 10대 소녀들을 데려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여성으로 키우려 했다.

고아원 출신인 사브리나는 토머스 데이라는 상류층 남성에 의해 ‘완벽한 아내’로 만들어지기 위한 대상이 된다. 이 사건은 훗날 영국 사회를 뒤흔들게 된다.
글항아리 제공

신간 ‘완벽한 아내 만들기’는 자신이 결혼하고 싶은 여성을 찾는 대신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 데이의 이야기를 담은 논픽션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웬디 무어는 데이가 소녀들을 입양한 고아원의 서류에서부터 출발해 데이의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따라간다. 책은 데이의 행동을 용인했던 당시 사회상과 상류층 남성들의 위선을 꼬집는다.

데이는 어린 시절부터 여성에 대한 비뚤어진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재혼하는 것을 보고 계부에게 넘어간 것이라고 여겼다. 그에게 여성은 순진한 처녀와 난폭한 남성에 의해 희생당한 피해자로 나뉘었다. 데이는 여성에 대한 교육을 강조하는 진보적인 성향을 보이면서도, 여성 혐오를 동시에 드러냈다.

데이의 여성관은 당시 사회 분위기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여성에게 법적으로 독립적인 권리가 없었다. 여성은 남성에게 단지 수동적인 존재로만 여겨졌다.

데이는 여성이 그리스 신화 속 여신처럼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시골 아가씨처럼 순수하고 꾸밈이 없어야 하며, 자신에게 복종해야 했다. 데이의 이런 여성관은 수차례 좌절로 이어졌다. 그는 결국 자신이 직접 소녀를 키워 자신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여성으로 성장시키기로 마음먹는다. 

토머스 데이의 초상화.

데이는 당시 등장했던 장 자크 루소의 교육론에 큰 감명을 받고, 루소의 ‘에밀’처럼 소녀를 자신의 취향에 맞는 여성으로 키우기 시작한다. 그는 고아원에 있던 12살 사브리나와 11살 루크레티아라는 소녀를 데려왔다. 데이는 소녀들에게 사치와 방탕에 대한 인내를 시험한다며 예쁜 옷이 들어 있는 상자를 준 뒤 갑자기 불에 집어던지고 불타는 것을 보게 했다. 충성심과 복종을 시험하기 위해 가짜 비밀을 알려준 뒤 발설하지 말라는 식의 교육을 했다.

책은 오늘날 시선에서 보면 지나치게 시대착오적이며 반인륜적이다. 데이의 이야기는 당시 영국의 남성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위선과 여성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보여준다. 데이의 주변 인물들은 데이의 실험을 알면서도 당사자들에게는 입을 닫았고 오히려 실험을 돕기도 했다. 데이는 1773년 ‘죽어가는 검둥이’(The Dying Negro)라는 글을 발표해 반노예제 운동에 앞장선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졌지만, 뒤에서는 소녀를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인간으로 키우며 여성 인권에 눈 감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

책에는 루소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 시대 관념적 사상의 한계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데이와 그의 친구 에지워스는 루소의 열렬한 신봉자였고, 에지워스는 아들을 루소의 에밀에 등장하는 소년 에밀처럼 자유분방하게 키운다. 데이는 에밀이 조용한 삶을 공유할 아내를 찾는 것을 보고, 자신도 완벽한 아내를 만드는 데 에밀 속 교육시스템을 사용하기로 한다. 그러나 에지워스의 아들은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으로 자랐고, 데이의 엽기적인 실험도 실패했다. 데이는 네 번의 약혼과 파혼 끝에 결혼했지만, 그 상대는 사브리나가 아니었다.

권구성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