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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섣달 그믐날 밤, 애틋한 사랑의 속삭임이…

입력 : 2017-12-29 10:00:00 수정 : 2017-12-27 20:4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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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왕궁터에 가톨릭의 성지… 발길 닿는 곳마다 역사유적지
충남 부여에서 전북 익산으로 천도한 백제 무왕은 왕궁리에 궁궐을 지었다. 대부분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과거의 모습은 오층석탑이 전부다. 8.5m 높이의 석탑은 넓은 터에서 홀로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진 풍파를 이겨냈다.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에 젖어든다.
사랑하는 이들이 부부가 돼 하루하루를 같이 살면서 서로 같은 장면을 보며 울고 웃는다. 10년, 20년이 지나 같이 머리가 희끗희끗해지면, 상대방의 얼굴에서 언뜻 내 얼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문득 ‘우리가 닮았었나’란 생각이 들며, 같이 웃고 때로는 서로 화내며 찡그렸던 일들이 떠오른다. ‘부부는 닮는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구나’란 생각에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외모뿐만이 아니다. 하루하루 수십년을 같이 살면서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을 맞춰가면 어느새 성격, 가치관, 식성 등도 비슷해진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서로를 조금씩 닮아간다.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이 만나 시간이 지날수록 같아지는 과정 아닐까.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찬찬히 보며 얼마나 나와 닮았는지 살펴보는 것도 올 한 해를 마무리하는 괜찮은 방법 중 하나일 듯싶다.

서로 닮은 석상이 지긋이 마주 보고 있다. 참 많이 애틋해보인다. 거리는 불과 약 200m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를 못한다. 이들의 만남은 일년의 마지막 날에만 허락된다. 단 하루, 섣달 그믐날 밤에만 이들은 만날 수 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잠든 밤에만 가능하다. 사람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야 하는 사이다. 일년에 하루지만 수백년을 그렇게 만나다보니 둘은 참 많이 닮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를 좀 더 잘 보려는 듯한 가늘게 뜬 눈을 비롯해 뭉툭한 코,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듯한 살짝 벌린 입 등 약간의 크기 차이만 있을 뿐 흡사하다.

전북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은 옥룡천을 가운데 두고 서쪽과 동쪽에 마주 보고 서있다. 턱수염이 있는 서쪽이 남자, 동쪽이 여자인데, 남자 입상은 목 부분이 갈라져 있다.
이들 사이를 가로막는 건 얕은 옥룡천 하나다. 옥룡천을 가운데 두고 서쪽과 동쪽에 비슷한 모습의 입상이 마주 보고 서있다. 전북 익산의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이 이 얘기의 주인공이다. 턱수염이 있는 서쪽이 남자, 동쪽이 여자인데, 남자 입상은 목 부분이 갈라져 있다. 이들은 평소에는 만나지 못하다가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옥룡천이 얼어붙으면 서로 만나 회포를 풀다가 닭이 울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조선 철종 9년 익산군수로 부임한 최종석이 쓰러져 방치돼 있던 4.2m 높이의 입상 두 기를 봉분을 쌓은 뒤 현재 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지금이야 주위가 논밭이고 살림집들이 있지만, 예전에는 옥룡천 일대가 갈대밭이었고 물길을 타고 배가 들어왔다고 한다.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밭 사이에 서있는 두 입상의 모습을 멀리서 봤다면 선남선녀의 애틋한 사랑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듯싶다.

왕궁리 유적의 수로.
◆ 국경을 넘어 사랑한 무왕과 선화공주의 흔적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얘기는 전설일 뿐이지만, 국적을 초월해 애틋한 사랑을 한 인물들이 익산과 관련돼 있다.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 셋째 딸 선화 공주의 사랑얘기다. 진평왕은 선화 공주가 밤중에 남자를 몰래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내용의 노래가 퍼지자, 선화 공주를 궁궐 밖으로 내쫓았다. 궐 밖으로 나온 선화 공주는 서동을 만났고, 서동은 선화 공주에게 ‘서동요’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밝혔다. 어릴 적 무왕의 이름은 서동이었다. 선화 공주는 놀랐으나, 서동이 꾀가 많고 도량이 넓은 것을 확인하고는 그를 따라 서동의 고향 땅인 백제로 건너왔다는 얘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이후 백제 왕이 된 서동은 충남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를 추진했고, 그들의 무덤이 익산의 쌍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쌍릉 중 대왕묘는 무왕, 소왕묘는 선화공주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진짜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쌍릉보다 이들과 더 직접적으로 관련된 곳은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다. 익산이 충남 공주, 부여와 함께 백제 유적을 품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로 지정된 이유가 이 두 곳 덕분이다.

동네 이름부터가 예부터 ‘왕궁리’다. 왕궁리 유적은 무왕이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하며 왕궁을 지은 곳이다. 동서 250m, 남북 500m 규모의 왕궁터에서는 수도였음을 방증하는 ‘수부(首府)’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금과 유리 세공품 등 유물 1만여 점이 나왔고 현재도 발굴 조사 중이다. 유물 외에도 백제시대 조성한 정원터, 금을 가공하던 공방터, 담장 등이 발굴됐다. 특히 당시 사용하던 공용화장실 유적이 나오기도 했다. 경사진 왕궁 부지에 물이 흐르도록 수로를 조성해놨는데, 일정 높이 이상 오물이 쌓이면 수로를 따라 자연적으로 배출되는 구조다. 왕궁터의 화장실 유적은 훼손 우려로 흙으로 덮어놨고, 왕궁리유적전시관에서나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금, 옥, 유리 등으로 만든 세공품.
왕궁리 유적은 대부분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과거의 모습은 오층석탑이 전부다. 석탑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백제에서 고려까지 의견이 분분하다. 넓은 터에 홀로 1000년이 넘는 세월을 버텨온 것만은 분명하다. 8.5m 높이의 석탑이 긴 세월의 모진 풍파를 이겨내고,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감에 젖어든다.

미륵사지 연못에 비친 동탑.
미륵사지 서탑은 현재 6층까지만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때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 오히려 흉측한 몰골로 남게 됐다. 현재 서탑은 커다란 가설 덧집 안에서 복원이 이뤄지고 있다. 옛 모습을 추정해 탑을 9층까지 인위적으로 쌓는 대신, 시멘트를 떼어낸 뒤 현재 남은 6층까지만 돌을 쌓는 방식으로 복원중이다.
미륵사지는 현재의 모습보다 과거의 모습을 떠올려야 한다. 사찰은 하나의 탑 뒤에 부처를 모신 불전인 금당 한 채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미륵사는 3탑 3금당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던 곳이다. 왼쪽에 있는 서탑이 우리에게 익숙한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으로, 24m 높이의 9층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컸던 석탑이다. 하지만 긴 세월을 이겨내지 못하고 현재는 6층까지만 남아있다. 그나마도 한 면은 일제강점기 때 보수라는 명목으로 시멘트를 덕지덕지 발라 오히려 흉측한 몰골로 남게 됐다. 현재 서탑은 커다란 가설 덧집 안에서 복원이 이뤄지고 있다. 옛 모습을 추정해 탑을 9층까지 인위적으로 쌓는 대신, 시멘트를 떼어낸 뒤 현재 남은 6층까지만 돌을 쌓는 방식으로 복원하고 있다. 이는 1992년 복원된 동탑과는 비교된다. 동탑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자재가 발견되자, 옛 모습이 확실치 않음에도 9층 크기로 복원했다. 미륵사지의 두 탑을 보면 유적의 원형이 확실치 않음에도 옛 모습을 추정해 복원하는 것이 옳은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 남겨두는 것이 나은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 금동사리외호와 금제사리내호. 안에서 다량의 구슬과 사리 등을 수습했다.
미륵사지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는 것도 잊지 말자. 서탑 발굴 당시 나온 금제 사리장엄구와 금제 사리봉안기가 전시돼 있다. 사리봉안기에는 백제 왕후가 무왕의 안녕을 기원해 미륵사를 창건했다는 내용과 건립 연대 등이 기록돼있다. 기록자는 무왕의 왕후 선화 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의 딸로 돼 있다. 다른 왕후인 셈이다. 서탑이 아닌, 가운데 서 있었을 목탑 또는 동탑에 선화공주가 남긴 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익산 웅포 곰개나루는 강폭이 넓어 강물 흐름이 매우 느리다. 금강이 마치 호수처럼 고여있는 듯해 차분하고 고요하다. 일몰이 되면 금강 물줄기는 붉은 기운을 한껏 머금는다. 하늘도, 강도 붉게 물들인 해가 아스라이 보이는 산 너머로 지는 장관이 펼쳐진다.
◆ 붉은 비단이 깔린 금강의 일몰


일몰 하면 서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하지만 꼭 서해를 고집할 필요 없다. 익산에서는 일몰 때 아름다운 붉은 비단이 깔리는 금강 너머로 지는 석양을 볼 수 있다. 웅포 곰개나루가 그곳으로, 포구의 지형이 마치 곰이 금강물을 마시고 있는 형상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곰개나루의 일몰 포인트는 언덕 위에 놓인 정자다. 이 정자는 덕양정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근 용왕사로 현판을 바꿨다. 매년 정월 대보름날 마을의 안녕과 번영, 풍어를 기원하는 용왕제를 지내던 용왕사터였다. 이 부근은 강폭이 넓어 강물 흐름이 매우 느리다. 마치 호수처럼 고여있는 듯하다. 파도가 치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바다의 일몰과는 확연히 다른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다. 일몰이 되면 금강 물줄기는 붉은 기운을 한껏 머금는다. 하늘도, 강도 붉게 물들인 해가 아스라이 보이는 산 너머로 지는 장관이 펼쳐진다.

익산 나바위성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서품하고 제주를 거쳐 뭍에 첫발을 내디딘 나암포 인근에 있어서 한국 가톨릭의 성지 중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나바위성당의 매력은 우리 한옥과 서양 고딕 양식이 혼합돼 있다는 점이다. 정면에서 보면 종탑과 아치형 회랑 등 평범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전통 한옥 양식이 섞여 있어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나바위성당에 모셔진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초상화.
무슨 종교를 믿는지는 상관없다. 이맘때 차분히 한 해를 마무리하길 원한다면 한 번쯤 들러볼 만한 곳들이다. 화산천주교회라는 이름보다는 나바위성당이 더 익숙하다. 성당이 있는 화산이 너른 바위가 많아 인근 마을이 납바위마을로 불렸다. 여기서 나바위성당이란 이름이 붙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서품하고 제주를 거쳐 뭍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바로 나바위성당 인근 나암포여서 이 성당은 한국 가톨릭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익산 두동교회는 외관이 ‘ㄱ’자 형태로 꺾여있다.
교회 내부는 목사가 설교하는 강단을 중심으로 보면 ‘ㅅ’자 형태로 돼 있는데, 남녀가 앉는 자리가 구분된다.
하지만 1906년 성당을 지을 땐 이런 사실을 몰랐고, 성당 조성 후 알게 됐다고 한다. 나바위성당의 매력은 우리 한옥 건물과 서양 고딕 양식이 혼재돼 있다는 점이다. 정면에서 보면 종탑과 아치형 회랑 등 평범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지만, 측면에서 보면 전통 한옥 양식이 섞여 있어 색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성당 내부 가운데에 나무 기둥이 서있는데, 건립 초기엔 이를 기준으로 왼편은 남자가, 오른편에 여자가 앉았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교회도 있다. 나바위성당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두동교회는 외관이 ‘ㄱ’자 형태로 꺾여있다. 1929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목사가 설교하는 강단을 중심으로 보면 ‘ㅅ’자 형태로, 역시 남녀가 앉는 자리가 구분된다. 두 곳 모두 선교활동을 위해 남녀가 유별했던 당시 사회적 전통을 존중했던 것으로,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익산=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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