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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도울 수 있다면 악마와도 손잡겠다”

입력 : 2017-12-16 03:00:00 수정 : 2017-12-15 23:3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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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접종 위해 휴전 이끌어내고
독재자와 친교후 아동 구호작업
‘아동생존혁명’ 원대한 목표 이룬
유니세프 3대 총재 짐 그랜트
15년 재임기간 대담했던 삶 조명
애덤 파이빌드 지음/김희정 옮김/부키/1만8000원
휴머니스트 오블리주/애덤 파이빌드 지음/김희정 옮김/부키/1만8000원


“매년 목숨을 잃는 1700만명의 어린이들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언어로 입을 떼기 시작했는지, 무엇을 이룰 잠재력을 지녔는지에 상관없이 그들은 그들이 태어난 세상에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런 식의 불필요한 생명의 낭비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가 아닐까요.”

1980년 유니세프 수장에 오른 짐 그랜트(1922∼1995)는 원대한 목표와 무모할 정도의 추진력으로 ‘아동생존혁명’을 이뤄낸 사람이다. 그는 빈곤을 상대로 한 투쟁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에 대한 선입견을 깨부순 인물로 평가받는다. 신간 ‘휴머니스트 오블리주’는 그랜트가 유니세프 3대 총재로 재임했던 15년을 중심으로 그의 치열하고 대담했던 삶을 조명한 에세이다.

그랜트의 대표적인 업적은 아동 사망률을 크게 낮춘 것이다. 재임 초기에는 소금과 설탕을 일정 비율로 섞어 물에 타서 먹는 방법으로 설사병을 잡는 ‘경구재수화염’ 보급 사업을 펼쳤고, 이후에는 예방접종 확대로 관심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재임하던 기간 아동 사망률을 높이는 가장 큰 원인은 전쟁이었다. 당시 세계 곳곳에서 내전이 벌어졌다. 특히 1980년 시작돼 1992년까지 계속된 엘살바도르 내전에서 7만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이들이었다. 

1980년 유니세프 수장에 오른 짐 그랜트(1922∼1995)는 예방접종을 통해 아동사망률을 크게 낮췄다. 그는 내전 지역의 아동에게 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휴전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부키 제공
그랜트는 전쟁의 참화 속에서 총탄에 맞아 죽는 아이들보다 전쟁으로 예방접종을 받지 못하거나 영양공급이 어려워 죽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전쟁을 잠시 멈추고 필요한 구호품과 의약품을 전달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당시 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휴전하는 것은 전대미문의 일로 여겨졌다. 그랜트는 엘살바도르 반군과 협상하기 위해 가톨릭 교단의 참여를 이끌었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대통령을 설득했다. 마침내 내전이 한창이던 1985년 2월3일과 3월3일, 4월21일 세 차례에 걸쳐 ‘고요한 평화의 날’이 이어졌다. 이날을 이용해 25만명의 아이들에게 소아마비, 홍역, DPT(디프테리아·백일해·파상풍) 예방접종이 이뤄졌다. 1992년 내전이 끝날 때까지 엘살바도르에서는 ‘고요한 평화의 날’이 매년 반복됐고, 그 결과 많은 아이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랜트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독재자와 손잡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그랜트의 행동이 독재자의 정책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그는 “아이들을 도울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손잡는 것을 망설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그랜트는 에티오피아와 아이티 등에서 독재자들에게 구애하듯 대하며 친해진 뒤, 구호물자 전달이나 경구재수화염 보급 등을 진행했다. 1990년 71개국 국가수반과 88명의 정부 대표를 모아 ‘어린이를 위한 세계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것도 그의 대표적 업적 중 하나다.

그러나 ‘성과지향적’인 그를 향한 비판도 이어졌다. 어린이의 생존에만 집중한 나머지 다른 주요한 문제들은 무시해도 된다는 태도를 보여 반감을 샀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은 관료적이고 합의도출 지향적인 유엔의 문화와 충돌했다. 재정관리 문제와 인사 관련 문제 등을 놓고도 부정적인 평가가 잇따랐고, 예방접종 사업에 대해서는 단기 목표에 집중하느라 장기적인 지속성을 해쳤다는 외부 보고서도 있다.

저자 애덤 파이필드는 ‘유니세프 미국 기금’에서 일하면서 짐 그랜트에 관한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이 책을 썼다. 그는 “유니세프의 사명은 짐 그랜트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것이었다”면서도 “그러나 그(그랜트)가 없었다면 어느 것 하나 가능했을까”라고 되묻는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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