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짙어져가는 그리움 … 오늘도 기다려봅니다

입력 : 2017-12-07 20:54:07 수정 : 2017-12-07 20:54:05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허철 감독의 ‘돌아온다’ / 시골 막걸리집을 배경으로 / 손님들 ‘ 아픈 사연’ 풀어놔 / 수채화같은 영상·진한 여운 … / 자극적인 작품에 길들여진 / 관객들에 힐링의 시간 선사 / 동명 연극에 감동 받은 감독 / 무대 위 배우들 섭외해 작업
온통 녹차가루를 흠뻑 뿌려놓은 듯한 풍광이 객석의 눈과 마음을 단번에 앗아간다.

우리나라에도 저런 곳이 있었나 싶을 만큼 관광엽서 같은 경치가 스크린 가득 펼쳐진다. 초록은 곧 힐링이다. 한달음에 찾아가 현장답사 인증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고픈 유혹을 쉽게 뿌리치지 못할 법하다.

허철 감독의 ‘돌아온다’는 보는 이의 마음을 착하게 만드는 영화다. 아침 안개, 이슬, 녹색의 논, 상서로운 연못, 야경, 돌탑, 시골길… 때묻지 않은 자연이 금세 마음을 낚는다.

‘여기서 막걸리를 마시면 그리운 사람이 돌아옵니다’

녹음이 짙푸른 시골 막걸리집 현판 글이다. 마치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들을 반드시 재회하게 하겠다는 주문이라도 걸듯, 마음속 깊이 그리움을 품은 이들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주막이다. 어느 날 오후, 서울에서 주영(손수현)이라는 젊은 여성이 찾아온다.

적잖은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놓는 방식이다. 막걸리집 변사장(김유석)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지만 가슴속에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후회와 그리움을 담고 있다. 폐교된 학교에 다시 아이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교사 유미(강유미)는 어느날 군복무 중이던 아들의 군번줄을 전해 받는다. 진철(최종훈)은 8년 전 돈을 들고 도망간 아내를 기다리며 늘 술에 절어 지낸다. 어릴 적 잃어버린 아들을 그리워하는 할매(김곽경희)는 욕을 달고 살며 매사 툴툴대지만 마을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기도 한다. 우연히 들른 막걸리집에서 단골손님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스님(리우진) 또한 깊은 그리움 하나를 품고 다닌다.

누군들 아픈 사연을 만들며 살고 싶었겠는가. 다행히 객석에선 이들의 피곤한 일상이나 사무친 지난 삶을 굳이 기억해가며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허 감독이 적당한 순간에 퍼즐을 맞춰 주는 친절을 베풀기 때문이다.

고사리나 도라지 나물처럼 영화는 심심하다. 상추, 케일, 치커리, 청경채, 풋고추, 파, 당근, 양파, 오이 같은 맛이 난다. 초등생 입맛을 가진 이들에겐  그다지 재미가 없다는 얘기다. 이는 쓴맛 단맛 짠맛으로 버무려진, 약물투성이의 할리우드 영화에 ‘눈맛’이 이미 중독되어버린 탓이다.

마블이나 DC 영화에 피로와 지겨움을 느낀 관객이라면 지금이 딱 ‘돌아온다’를 챙겨 볼 때다. 곧 마블의 히어로들이 죄다 몰려나오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공세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이언맨부터 캡틴 아메리카, 토르, 헐크, 호크아이, 블랙 위도우, 스파이더맨, 앤트맨, 블랙 팬서, 윈터 솔져, 닥터 스트레인지 등 국내 극장가를 초토화시킬 태세다. 조용하고 느린 영화 ‘돌아온다’로 더더욱 안구를 정화해 둘 때다.    

‘돌아온다’는 제36회 서울연극제 우수상에 빛나는 동명연극이 원작이다. 허 감독은 연극을 관람한 뒤 그 매력에 빠져 영화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움이라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와 복합적인 감정을 지닌 인물들의 입체감을 드러낸 대사 등으로, 원작이 지닌 매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원작과는 또다른 매력을 빚어냈다.

연극의 감동을 스크린에 옮기고자 대학로 연극무대 베테랑 배우들을 캐스팅했다. 특히 이황의, 김곽경희, 리우진, 강유미는 동명의 연극에 출연했던 배우들답게 대사와 몸짓에 진정성을 더하며 극의 흐름에 묵직한 힘을 싣는다.

지난 9월, 제41회 몬트리올국제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프랑스 여배우 페니 코텐콘은 “빗물에 옷이 젖는지도 모르듯 밀려오는 감동을 선사한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고, 비평가들은 “캐릭터들의 생뚱맞음이 나중에 서로 교묘하게 연결되면서 감동을 주는 웅장한 연극을 본 느낌”, “음악과 사운드 디자인이 훌륭한 시적인 영화” 등의 호평을 남겼다.

15년 동안 미국에서 다양한 분야의 영상감각을 익힌 허 감독은 상업영화의 틀을 벗어나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이야기를 전하며 작가주의 영화를 견지해오고 있다. 한국 영화 제작의 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판’과 제주 강정마을을 주제로 한 ‘미라클 여행기’를 선보였다. 그는 “다 아는 내용인데도 또 한번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보편성이 주는 힘”을 ‘돌아온다’의 매력으로 꼽는다.

만나면 먼저 환하게 웃어보일 줄 아는 그가 야무지게 말한다.

“거대자본으로 포장된 비스무레한 영화들만 판치는 한국영화판에 ‘색다른’ 영화로 다가가겠습니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