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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단순지식 경계 무너지고 / 엘리트주의에 대한 염증 커져 / 검색 잘하는 자가 전문가 대접 / 평등편향으로 전문지식 홀대 자신의 약점을 잘 아는 적과 싸울 때는 이기기가 더 힘들다. 겸손함과 교정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알고보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은 그런 면에서 아주 영리하다. ‘쓸데없는 잡학’이라고 방어벽을 설치했는데도 심지어 쓸데 있어 보이는 유익함을 제공하니 무장해제된다. 방송인 김생민도 새로 시작한 ‘영수증’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금융인이나 회계사는 아니지만 의뢰인들의 지출 내역을 분석한 후 낭비를 했다면 ‘스튜핏(stupid, 어리석은)’이라며 지적하고, ‘짠내’ 나는 소비에 대해서는 ‘그뤠잇(great, 훌륭한)’이라며 칭찬한다.

물론 웃자고 하는 이야기에 죽자고 덤비는 것처럼 우스운 일도 없다. 예능은 예능일 뿐이니까. 문제는 예능이 아닌 것을 예능처럼 소비할 때 발생한다. 지식이 정보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진짜와 가짜, 고급지식과 단순지식의 경계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톰 니콜스가 쓴 책 ‘전문가와 강적들’을 참고하자면, 이런 경향의 배후에 엘리트주의에 대한 염증이 자리 잡고 있다. ‘지적 평등주의’라는 미명 하에 ‘확증편향’이나 ‘평등편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 확증편향이고, ‘나나 너나 뭐가 달라’라며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평등편향이다. 심지어 요즘에 급부상한 전문적인 애호가들을 일컫는, 소위 ‘덕후’들까지 전문가의 영역을 침범해온다.

이런 전문가의 위기를 전문가들이 자초한 바도 크다. 니콜스의 책에서 대표적인 사례로 드는 것이 ‘탈리도마이드(thalidomaid)’라는 의약품이다. 임신부에게 처방해도 안전하다고 전문가들이 검증해줬지만 기형아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밝혀지면서 이 진정제의 이름은 ‘전문지식의 실패’와 동의어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틀릴 확률이 비전문가보다 낮은 사람들임을 강조한다. 탈리도마이드처럼 실패한 사례보다는 전문가들의 지식으로 개발된 아스피린이나 항생제의 효용도가 엄청 크기 때문이다.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인쇄술의 발명에서 위키백과의 탄생까지 지난 550년간에 이루어진 거의 모든 지식의 역사를 다룬 피터 버크의 책 ‘지식의 사회사’를 보면 영어에서 ‘전문가(specialist)’라는 말은 1856년 의학 분야에서 처음 등장한다. 지식의 폭발이 지적인 노동 분업과 직업 사회의 출현이라는 배경과 맞물려 전문가가 각광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으로 올수록 지식의 민주화나 대량생산화가 이뤄지면서 비직업전문가에 대한 무비판적 숭배가 이뤄졌다고 본다. 지식이 아닌 정보가 폭발하면서 검색을 잘하는 사람이 전문가 취급을 받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영화 ‘셜리:허드슨강의 기적’에서 비행기 조종사 셜리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전문기술로 허드슨강에 불시착해 기적적으로 155명 승객 전원을 살렸는데도 경제논리나 상식논리를 앞세운 보험사에 의해 기소당한다. 이런 황당하고 억울한 상황에 대해 셜리는 다음처럼 한탄한다. “재밌는 게 뭔 줄 알아? 40년간 100만명의 승객을 태웠는데 208초 사이의 일로 평가받는단 거야.” 그는 사람의 목숨을 살린 영웅이 아니라 능력과 경력을 지닌 전문가로 평가받기를 원했을 뿐이다.

일반인이나 박식가, 애호가들이 전문가의 맹점을 보완해줄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가 전문가인 이유는 포퓰리즘이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대안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되돌아보자. 혹시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확증편향이나 ‘대등한 정보’라는 평등편향에 의해 전문지식을 홀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인기 있는 ‘해설자’가 아니라면 고리타분한 ‘설명충’에 불과하다는 이분법적 잣대에 익숙한 것은 아닌지. 전문가의 재수없는 권위주의가 싫어서 그들의 재수 있는 권위까지도 매도한 건 아닌지. 전문가가 필요 없는 사회는 컴퓨터만 존재하는 사회다.

김미현 이화여대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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