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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안뜰] 호연지기 기르고 수려한 경치 감상… 선비들의 '버킷리스트'

입력 : 2017-11-11 16:00:00 수정 : 2017-11-11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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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조선시대 선비들의 금강산 여행 / 민족 최고 명산 오르는 게 '평생의 숙원' / 산과 물·자연 보며 우주의 이치 깨달아 / 여행 체험 남긴 '유산기' 가이드북 역할 / 곳곳 역사 관련된 전설·불교 문화재 있어 / 한 달 장기여행… 시간·비용 많이 들어 / 승려들 유람객 수발 힘들어 떠나기도 등산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이다. 주말마다 주요 산에서는 앞사람 꽁무니를 쫓아 줄지어 오르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바쁜 도시에서 벗어나 산을 찾는 것은 현대인의 일상이 되었는데, 이러한 문화는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과거의 사람들도 산을 찾았고, 특히 조선시대 선비들은 금강산, 지리산과 같은 명산을 유람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선비들이 금강산을 유람하고 남긴 ‘유산기(遊山記)’라는 기행문들을 통해 그들의 여행을 따라가 볼 수 있다.

선비들은 왜 금강산을 찾았을까. 가장 큰 목적은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었다. 옛날부터 “원하건대 고려에서 태어나 금강산을 직접 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중국인들 사이에 회자될 정도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 금강산 구경은 많은 선비들의 평생의 숙원이었다. 금강산에 축적되어 있는 문화유산을 체험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유람 목적이었다. 금강산에는 역사와 관련된 전설과 불교문화재, 선인들이 여행 중에 남긴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는데, 선비들은 그 현장을 직접 찾아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고 이를 재음미하고자 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금강산이나 지리산과 같은 명산을 유람하는 것을 중시했다. 선비들은 유람한 경험을 글로 작성해 ‘유산기’(遊山記)를 남기기도 했다. 사진은 금강산에서 백천동을 구경하는 선비들을 그린 정선의 ‘신묘년풍악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한편으로 선비들은 공부를 위해 금강산을 찾았다. 선비들은 산이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장소이며, 산과 물의 모습은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하는 유교의 텍스트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쟁 등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에 처해 있던 사람들이 현실세계의 고난과 모순을 잊으려고 산에 오르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선비들이 금강산을 찾은 이유는 오늘날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회경제적 여건은 오늘날과 많이 달랐다. 이 때문에 금강산 여행은 오늘날의 해외여행과 비슷한, 아니 그 이상의 준비, 그리고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여행준비는 정보수집에서부터 출발하였으며, 먼저 다녀온 사람들의 유산기가 요즘의 가이드북과 같은 역할을 했다. 또한 오늘날과 같이 입소문도 중요하여 먼저 여행한 친지들의 구두정보가 큰 보탬이 됐다. 금강산에 주재하던 승려들도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여행비용의 조달, 교통편과 식량의 마련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여행은 서울에서 출발하면, 금강산을 가고 오는 데 각각 일주일, 금강산 구경에 이주일 정도가 소요되었으므로 한 달에 가까운 장기여행이었다. 친구들과 여행을 계획했다가 경비를 조달하지 못해 평생의 소원을 포기하는 선비도 있었다. 주로 도보로 여행했던 일반 백성과 달리, 선비들은 오고 가는 길에 말을 탔다.

당시 말은 비싼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말이 없는 선비는 친지나 관아에서 말을 빌리기도 했다. 당시 말을 빌리는 값을 계산해 본 결과, 오늘날 렌터카 대여 비용과 흡사했다. 말 이외에 나귀를 타기도 했다. 나귀는 체력이 강하고 돌이 많은 곳에서도 잘 걸어 조선시대에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말에 비해 값이 싸고 먹이를 조금 먹으며 오랫동안 걸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었다. 고위관료들은 가마를 타기도 했다. 특히 금강산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에 산을 유람하는 데 가마의 일종인 남여(藍輿)를 사용했다. 산에서 남여를 메는 일은 주로 승려들이 담당하였는데, 무척 힘든 일이었다.

금강산 유람은 주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했다. 여성을 동반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간혹 여성이 동행하는 경우는 대개 기생이었다. 대신 선비들은 남자종을 반드시 동반했다. 종은 말을 끌고 짐을 들며 여러 가지 심부름을 했다. 금강산 여행에는 악기를 연주하여 흥을 돋우는 역할을 맡은 악공과,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림으로 옮길 화공이 동반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리고 산에서는 승려들이 가이드 역할을 했다.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여행의 중요한 부분이다. 선비들이 오고 가는 길에 많이 숙박한 곳은 역(驛)과 원(院), 관아건물, 절, 지인의 집 등이었다. 전·현직 관료들은 역이나 관아건물을 많이 이용하였으며, 금강산에서는 모두 절에서 잤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혈연이나 지연, 그리고 학연으로 얽힌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있었으므로 이를 최대한 활용하여 숙박과 식사의 편의를 제공받았다. 여행 중의 식사는 출발 전에 미리 준비하는 경우, 직접 취사를 하는 경우, 지인에게 대접을 받는 경우, 주막 등에서 사 먹는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출발 전에 미리 준비한 음식은 쌀과 반찬, 술, 그리고 쌀·보리·콩 등 곡식의 가루, 말린 고기와 밥, 떡과 과일 등이었다. 요즘 우리가 등산 갈 때 준비하는 식사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유람 중의 취사는 동행한 종이나 승려가 맡았다.

유람객이 많이 찾는 절의 승려들은 길 안내인과 남여를 메는 가마꾼 역할을 한 것은 물론, 이와 같이 식사와 잠자리 제공의 임무까지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 부담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금강산에서는 절별로 일정한 구역을 정해 남여를 나누어 메고, 일정한 장소에서 서로 교대하기도 했다. 따라서 선비 접대를 둘러싸고 사찰 간에 다툼이 벌어지는 일이 있었으며, 유람객 수발이 너무 힘들어 절을 떠나는 승려가 늘어나고, 이로 인해 절이 쇠퇴하는 현상도 생겼다.

선비들은 금강산의 경치와 문화유산을 구경하는 중에도 틈을 내어 시 쓰기, 독서와 토론, 제명(題名) 등 여러 가지 활동을 했다. 먼저 시 쓰기는 특정장소에 이르러 선인들이 지은 시를 회상한 다음, 이와 비교하여 자신의 감흥을 시로 옮기는 것이 관행화되어 있었다. 이 때문에 선비들이 유람 중에 쓴 시는 대개 그 소재가 중복되었으며, 선비들이 많이 찾은 명승지나 절이 주요한 소재였다.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하루에 스무 편 이상의 시를 쓴 이도 있었다. 선비들은 유람 중에도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많이 읽은 책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으로, 유람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마음공부에 도움에 되는 것들이었다. 선비들은 유람 중에 동행한 친지, 산에서 만난 승려와 많은 토론을 하였는데, 그 주제는 유교와 불교, 산의 경치와 역사, 전설과 문화유산 등 다양했다.

명승지에 자신의 이름이나 시를 쓰는 제명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선시대에 매우 성행했다. 오늘날에도 세계 각지의 관광지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 비난을 받는 한국이나 중국관광객들이 있는데, 사실 유구한 전통이 있는 행위이다. 당시 제명은 시 쓰기와 함께 선인의 유람관행을 본받는다는 의미가 강하였으며, 일종의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금강산에서는 만폭동 바위에 새긴 양사언의 제명이 유명하여 “만폭동 경치값이 천 냥이면, 그중 오백 냥은 양사언의 글씨값”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선비들이 꼭 들르는 필수코스였다. 금강산에서의 제명은 바위는 물론, 건물 벽과 기둥 등 다양한 곳에 이루어졌다. 바위에 정으로 글자를 새기는 작업에는 승려와 종을 동원하였으며, 전문적인 각자승(刻字僧)이 존재하였을 정도로 그 수요가 많았다. 물론 이에 대해 산을 오염시키는 짓이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선비들도 적지 않았다.

정치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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