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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의창] 태릉의 역사, 태릉선수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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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11-09 21:11:05 수정 : 2017-11-09 2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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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의 묘
왕릉 복원 중요하지만 선수촌 보존도 의미
태릉(泰陵)은 조선의 11대왕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의 무덤으로, 1565년 문정왕후가 승하한 후에 그 아들인 명종이 조성하였다. 생전에 문정왕후는 남편인 중종의 무덤 곁에 묻히고 싶어했다. 그런데 1544년 중종이 승하한 후 무덤은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 옆에 조성되었고, 이름을 정릉(靖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아들인 명종이 왕위에 오른 후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잡았던 문정왕후는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사후에 자신이 중종 곁에 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중종 정릉의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는 점과, 선왕인 성종의 선릉(宣陵) 옆으로 가야 한다는 점을 명분으로 내세워 무덤을 옮겼다. 문정왕후가 심혈을 기울인 사찰 봉은사가 왕릉의 원찰로 기능을 하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명종 대에 새로 옮긴 중종의 정릉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났고, 홍수 때는 재실(齋室)까지 물이 차기도 했다.

결국 문정왕후는 그 자리에 묻히지 못했다. 생전에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지만, 사망 이후 무덤은 그녀가 원하던 곳이 아닌 현재의 태릉 지역에 조성되었다. 1565년 4월 12일 문정왕후의 능 이름은 신정릉(新靖陵)으로 정해졌다. 중종의 무덤인 정릉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6월 4일 능호를 태릉으로 다시 정하였다. 생전에 원치 않는 곳이기는 했지만, 아들 명종이 왕으로 있던 시절에 조성되었기에, 태릉은 왕비의 단릉(單陵)이라 믿기 힘들 만큼 규모가 컸다.

효심이 두터운 아들 명종은 자신이 죽으면 그 무덤을 어머니 곁에 조성할 것을 명했고, 명종 사후 그의 무덤 강릉은 태릉 근처에 조성되었다. 왕의 무덤을 정할 때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 곁에 간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명종의 부친 중종은 왕비 1명도 곁에 두지 못하고 홀로 묻힌 무덤의 주인공이 되었다. 현재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중종의 정릉은 아버지인 성종의 선릉과 합하여 ‘선정릉’이라 칭하는데, 지하철 역명으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그리고 400년 후 태릉과 강릉으로 조성되어 사후에도 마주보는 위치에 있던 두 모자를 차단하는 시설이 들어섰다. 1966년 두 무덤 사이에 체육 인재의 산실인 태릉선수촌이 조성된 것이다. ‘태릉’은 잘 모르면서도 ‘태릉선수촌’으로 이 지역을 기억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올 8월에 태릉선수촌이 51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충북 진천으로 이전을 하면서 태릉의 역사는 또 한 번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선수촌의 철거로 문정왕후와 명종은 다시 재회하게 되었지만, 태릉에 위치했던 선수촌의 역사는 또 다른 운명에 놓였다. 한때 올림픽 금메달 116개를 따고, 월드컵 본선 진출의 산실이 되면서 대한민국 국력의 상징으로 기능했던 태릉선수촌의 건물 상당수가 철거 위기에 처한 것이다.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왕릉의 원형 복원도 중요하지만, 50년 이상 태릉에 자리를 잡고 많은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준 공간인 태릉선수촌의 주요 시설을 잘 보존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의미가 크다. 태릉과 태릉선수촌의 역사가 함께 공존하여 우리 시대는 물론이고 후손에게까지 널리 기억되는 방안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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