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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기결정권 vs 생명권… 누구를 위한 낙태죄인가

입력 : 2017-11-06 20:49:12 수정 : 2017-11-08 11:3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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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인공임신중절 횡행… 생명경시 풍조 만연 우려 / 다시 불붙은 ‘낙태죄’ 논란 / 청와대 게시판에 23만여명 ‘폐지’ 청원 / 유지측 “처벌 안해도 윤리적 문제 남아”… 폐지측 “임신·출산, 개인 결정 존중해야”
우리나라에서 낙태는 범죄다. 낙태를 한 여성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을, 의료인은 2년 이하의 징역형을 받을 수 있다.

최근 이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논란이 뜨겁다. 지난 9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낙태죄 폐지 요구’ 글에 무려 23만5372명이 청원하면서다. 원치 않는 임신으로 괴로워하는 여성의 고통에는 눈을 감고 태아의 생명권만 앞세우는 낙태죄를 폐지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낙태죄를 폐지하면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 또한 여전히 강하다. 헌법재판소는 현재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심리 중이다.

◆낙태의 95%는 은밀히 진행… “태아 생명권 보호 공익 크다”

A(24·여)씨는 지난겨울 낙태를 했다. 남자친구와 교제 기간이 짧았던 데다 둘 다 취업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원치 않은 임신이었고, 출산은 인생의 ‘걸림돌’로 여겨져서다. A씨는 입소문, 인터넷 정보 등으로 알게 된 병원을 찾았다. A씨와 남자친구 둘다 낙태라는 단어는 한번도 꺼내지도 않았지만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낙태라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이 같은 사례는 적지 않다. 다만 낙태가 불법이어서 실제 얼마나 이뤄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기 어려울 뿐이다.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를 요구하는 익명의 여성 모임 `비웨이브(BWAVE: Black Wave)가 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대 걷고 싶은 거리 광장에서 임신중단(낙태) 전면 합법화를 촉구하고 있다.

6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5년 실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결과 한 해 34만2000여건의 낙태가 시행됐다. 2010년에는 16만8700여건으로 파악됐지만 전문가들은 과소추정된 수치라고 지적한다. 병원이 진료기록에 남기지 않고 행한 수술은 이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당국이 공식 집계한 낙태 건수는 전체의 5%에 불과할 뿐 나머지 95%는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게 대다수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의료사건 전문변호사는 “어떤 병원이 처벌의 위험을 감수하고 공식적인 기록을 남기겠느냐”며 “인공임신중절수술 도중 일어난 의료사고로 어려움에 처한 여성과 유족이 있지만 어디에도 도움을 구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헌재는 2012년 “낙태를 처벌하지 않을 경우 현재보다 훨씬 더 낙태가 만연하게 돼 자기낙태죄 조항의 입법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뿐더러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해 결코 중요하다고 볼 수 없다”며 합헌 결정을 내렸다.
◆“전 여친에게 복수하고 싶어요”… 악용되는 낙태죄

낙태죄는 여성과 의료인만을 처벌 대상으로 할 뿐 남성은 제외돼 있다.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한 모자보건법도 수술 시 남성의 동의를 반드시 구하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상대의 동의 없이 출산을 결심한 여성이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거나 뒤늦게 낙태 전력이 알려져 협박을 받는 경우도 있다.
김미연(가명)씨는 2015년 5월 임신이 된 걸 알게 됐다. 김씨와 남자친구는 결혼을 고려했다. 하지만 남자친구 집에서 반대했고 임신도 용납할 수 없다며 낙태를 종용했다. 김씨는 출산 의지가 강했고, 낙태가 불법이라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결국 아이를 낳았지만 직업도 없는 상황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컸고 남자친구는 김씨가 마음대로 자식을 낳았으니 책임도 혼자 지라며 외면했다. 결국 김씨는 법원에 남자친구를 상대로 아이가 친자임을 확인하고 양육비를 달라는 소송을 냈다.

일부 남성은 여성의 낙태 전력을 빌미로 협박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 ‘낙태’ ‘낙태 처벌’ 등을 검색하면 “낙태한 여자친구가 양육비를 요구하면 낙태죄로 신고할 수 있을까요” 등을 묻는 게시글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실제로 지난 5월 의정부지법은 이별을 고한 여자친구에게 앙심을 품고 여자친구와 함께 낙태를 도운 의사를 고발하고 합의금 명목으로 600만원을 뜯어낸 혐의로 기소된 장모(22)씨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여성계는 “현행법이 불법적이고 윤리적으로 비난 가능성이 있는 부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여성에게만 덮어씌우고 있다”고 비판한다.

◆누구를 위한 낙태죄인가… 유지 여론도 만만치 않아

낙태죄는 1953년 제정된 첫 형법에서 명시돼 지금까지 기본틀을 유지하고 있다. 이후 모자보건법 14조를 통해 예외적 규정을 두면서 허용기준을 마련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1970년대 정부가 추진한 가족계획사업이 기본적으로 고려돼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진지한 고려나 여성의 결정권에 대한 배려가 배제됐다는 지적도 있다.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책국장은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사회나 국가가 강요하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여성 개인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것”이라며 “현행법에는 사회·경제적 측면을 아예 배제한 상태에서 임신기간은 물론 출산과 육아에 대한 부담과 책임을 여성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윤성 국가생명윤리정책연구원 원장은 “모자보건법에서 허용한 인공임신중절수술 대상에는 흔치 않은 질병이 있더라도 출산 후 정상인과 같이 생활할 수 있는 경우도 포함돼 있다”며 “태어나자마자 사망하는 ‘무뇌아’에 대한 낙태는 금지하면서 선천성 기형이나 유전성 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허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낙태죄를 폐지할 경우 낙태 시술이 일상화돼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할 것이라는 사회의 우려도 만만치 않다.

심상덕 진오비산부인과 원장은 “간통죄가 폐지됐다고 해서 도덕적인 지탄에서 자유로운 게 아니듯이 낙태 역시 처벌하지 않는다고 윤리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고 말했다.

낙태반대운동연합에서도 “인간 생명을 소중히 여겨 보호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책임”이라며 “성관계라는 원인은 선택하면서 결과인 임신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은 옳지 않는 행동방식”이라고 주장했다.

지난해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선 ‘낙태를 더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는 응답(21%)보다 ‘필요하면 허용해야 한다’는 답변이 74%로 훨씬 높게 나왔다.

◆먹는 낙태약 ‘미프진’ 찬반 팽팽

시민 23만여명이 청와대 게시판에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과 함께 경구용 자연유산유도약 ‘미프진’의 합법화를 요구하면서 이 약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먹는 낙태약’으로 알려진 미프진 남용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와 안전성이 검증된 만큼 합법화하는 게 여성 건강권을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경구용 자연유산유도약 `미프진`
1980년대 프랑스에서 개발된 미프진은 자궁 내 착상된 수정란을 자궁과 분리시키는 역할을 하는 ‘미페프리스톤’과 자궁을 수축해 분리된 수정란을 자궁 밖으로 밀어내는 ‘미소프로스톨’이 패키지로 된 약품의 브랜드 명이다. 국내에서는 미페프리스톤의 유통 및 도입을 허용하지 않는 상태다.

낙태 반대론자 등은 미프진이 시장에 유통될 경우 ‘자가낙태’와 ‘자가처방’이 만연하고 부작용이 커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실제로 전문가의 지도 없이 미프진을 복용할 경우 구역질이나 심한 출혈은 물론 불완전 유산의 가능성이 있다. 심상덕 진오비산부인과 원장은 “우리나라처럼 낙태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큰 곳에서 섣불리 미프진을 허용했을 경우 손쉬운 낙태 수단으로 약물이 사용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미프진 도입을 찬성하는 시민들은 무조건적인 금지가 오히려 여성의 건강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된 가이드라인을 따를 경우 흡입식 인공임신중절시술에 비해 안전하다는 것이다. 찬성론자들은 또 구입 및 복용이 허용돼 있지 않은 상태에선 오히려 유통의 음성화, ‘가짜약’ 복용의 위험성이 크다고 강조한다.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미프진이 개발돼 사용된 지 30년이 넘었고 안전성 역시 보장된 상태”라고 밝혔다.

김민순 기자 so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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