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지 휴스 지음/김혜란 옮김/모노그래프/3만6000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서방의 각국 정상들과 사이가 좋다.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빼앗아 한때 ‘미운오리새끼’ 신세였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식이다. 푸틴의 능숙한 외교력 덕분이다. 그의 꿈은 ‘러시아 제국’의 재건이다.
푸틴의 롤모델은 제정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다. 표트르 대제가 건설한 페테르부르크(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임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 외교적 능력을 비롯한 통치방식이나 성격, 취향 등 여러 면에서 표트르와 푸틴은 닮았다. 다만 표트르 대제는 203cm 장신이고 푸틴 대통령은 165cm 단신이다. 표트르 대제를 보면 오늘의 러시아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아 사람과 가까이하려면 대개 표트르 대제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한다.
이 책 저자 린지 휴스(Lindsey Hughes·1949∼2006)는 러시아학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슬라브-동유럽학부 교수로 재직했다.
근대 러시아를 유럽 최강국으로 이끈 표트르 대제(1682~1725)는 일탈과 기행으로 유명했으나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리더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
표트르는 당시 북유럽의 강자 스웨덴을 제압하고 발트해를 장악한 후 해안가 습지에 불과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그는 유명한 주요 도로와 주요 건축물을 대부분 건설했다. 당시 만든 넵스키 대로는 지금도 가장 중요한 도로이며, 그의 지휘 아래 만든 서유럽풍의 건축물과 궁전은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표트르 대제가 유럽의 창구로 건설한 당시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야경. |
표트르는 엄청난 폭음을 했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강제로 술을 마시게 했다. 대사절단을 이끌고 네덜란드와 영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자신을 차르가 아닌 조선공으로 가장해 들어갔다. 이 또한 겉치레를 좋아하는 서구인들을 비꼬는 행동이었다. 그는 황태자 청년 시절 첫 전투에서 포병으로 참전했고, 군대에서도 하급 장교부터 차근차근 승진의 단계를 밟아 올라갔다. 한마디로 기인이었고, 시대를 앞서간 위인이었다.
표트르가 황제에 올라 통치할 당시 러시아는 서유럽을 위협할 만큼 강성했다. 표트르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해군을 창설했다. 이 해군력을 바탕으로 스웨덴을 제압하고 발트해를 장악했다. 그는 황제의 신분으로 서유럽에 종종 숨어들어가 조선술과 항해술을 익혔고, 서유럽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근대 러시아군을 만들었다. 러시아 최초로 신문을 발행하고 언론 출판을 장려했다. 그는 소매가 긴 러시아의 전통복장을 폐기하며 간소한 독일식 의복을 입도록 명령했다. 턱수염을 기르는 러시아의 전통을 무시하고 모든 백성에게 면도를 하도록 했다.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청소년 교육에도 힘썼다.
저자는 표트르 대제의 개혁은 그의 부친 알렉세이가 기틀을 다진 것이기에 가능했다는 지적도 했다. 그럼에도 스탈린의 소련은 표트르의 복제판이라는 점에 이견이 없다. 푸틴은 현재 구 소련권을 다시 결속시키려 하고 있다. 그는 크림반도 점령을 계기로 유럽과의 갈등을 뒤로하고, 동방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푸틴의 신동방정책이 그것이다. 표트르 대제는 영토 최서단에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유럽으로 향한 출구’로 삼았다. 푸틴 역시 최동단 블라디보스토크를 건설하려 한다. 구한말 시절 한반도는 어느 열강보다도 러시아와 친했다. 현대 러시아의 기원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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