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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명·옥살이·망명… 비극적 삶이 빚은 슬픈노래

입력 : 2017-09-28 20:39:26 수정 : 2017-09-28 21:4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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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혜선,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오늘처럼 인생이…’ 펴내 / 네루다와 함께 중남미 시단의 거장 / ‘나는 신이 아픈날 만들어진 존재’ / 고통 시달리다 46세에 세상 떠나 / 1998년 소개됐던 시들 더 다듬고 / 번역 안됐던 시 추가 122편 담아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내가 고생한다는 걸/ 모두들 압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이나 끝은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자신은 신이 아픈 날 만들어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시인이 있다. 신이 아파서 부실하게 점지된 인간, 그러니 나날은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의 뿌리가 깊은 시인이다. 그 시인 세사르 바예호(1892~1938)는 파블로 네루다와 함께 중남미 양대 시 산맥을 이룬 문호, 네루다와는 달리 고통에 시달리다 46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시인들이 좋아하는 시인으로 국내에서도 마니아층이 두꺼운 편이다. 한국에는 1998년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라는 선집으로 소개됐지만 절판된 상태에서 소문으로만 남은 상태였다. 고혜선 단국대 명예교수가 이번에 이전의 시선집에 수록된 시들을 다듬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시들을 추가해 122편을 수록한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다산책방)을 펴냈다.

“살다 보면 겪는 고통. 너무도 힘든… 모르겠어./ 신의 증오가 빚은 듯한 고통. 그 앞에서는/ 지금까지의 모든 괴로움이/ 썰물처럼 영혼에 고이는 듯… 모르겠어.// 얼마 안 되지만 고통은 고통이지. 굳은 얼굴에도/ 단단한 등에도 깊디깊은 골을 파고 마는…/ 어쩌면 그것은 길길이 날뛰는 야만족의 망아지,/ 아니면, 죽음의 신이 우리에게 보내는 검은 전령.”

시인은 길길이 망아지처럼 날뛰는 고통은 죽음의 신이 우리에게 보내는 ‘검은 전령’이라고 인식하면서 “그러면, 불쌍한... 가엾은... 사람은/ 누가 어깨라도 치는 양 천천히 눈을 돌려,/ 망연히 바라봐,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은/ 회한의 웅덩이가 되어 그의 눈에 고이고.// 살다 보면 겪는 고통. 너무도 힘든... 모르겠어”라고 ‘검은 전령’에서 되뇌인다. 그 ‘회한의 웅덩이’ 속에서는 사랑의 관능도, 그 열락도 죽음과 맞닿아 있다.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뿌리 깊었던 페루 시인 세사르 바예호. 남미의 직업혁명가 체 게바라가 필사했던 그의 시는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도 놓치지 않았다.
다산책방 제공
“우리 둘은, 꼭 붙들고 함께 죽어갈 겁니다./ 우리의 고통 덩어리는 서서히 말라갈 것입니다./ 우리의 죽은 입술들은 어두워질 것입니다.// 당신의 거룩한 눈에선 힐난의 빛도 없군요./ 다시는 당신을 욕되게 하지 않으렵니다. 우리는/ 한 무덤에서 다정한 남매처럼 잠들어 있을 겁니다.”(‘시인이 연인에게’)

한 무덤에서 다정한 남매처럼 잠들어 있는 것은 세사르 바예호의 다른 여러 시편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축복일지 모른다. 헤어지지 않은 셈이니, 배신하지도 않고 죽음일망정 부둥켜안고 같이 바스라지는 행로일 테니. 그렇지만 이 계절에 읽는 ‘9월’은 바예호의 유난한 비극적 시각을 넘어서서 많은 지금 이곳의 연인들에게도 관철되는 슬픈 서사다.

“9월 그날 밤, 당신은 내게/ 너무나 다정했다, 아플 정도로!/ 다른 건 모르겠어, 그런데 당신이/ 다정해서는 안 되었어, 안 되었지.// 그날 밤, 내가 이해하기 어렵고, 폭군 같았고,/ 아팠고, 슬픈 걸 보자 당신은 울었지./ 다른 건 모르겠어, 그런데/ 내가 왜 슬펐는지, 왜 그리 슬펐는지 몰라.// 9월의 그 사랑스러운 밤에만,/ 당신의 눈은 하느님과는 멀리 떨어진/ 막달레나 눈이었고, 나도 당신에게 다정했었지!// 9월의 오후였지, 그날, 자동차에서/ 당신의 뜨거운 몸에/ 12월 오늘밤 흘리는 눈물샘의 씨앗을 심었지.”(‘9월’)

바예호는 두 번에 걸친 ‘금지된 사랑’을 했다고 고혜선 교수는 옮긴이의 말에 적시했다. 한 번은 조카를 향한, 또 한 번은 사제의 숨겨둔 여인을 향한 것이었다. 사랑의 곡절 말고도 11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형과 누나, 모친의 이른 죽음을 겪어야 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으며, 유럽으로 망명해 고독한 삶을 살았던 바예호의 삶은 그의 비극적 인식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스페인내전의 공화파를 위해 전 재산을 헌납하고도 참전하지 못한 마음의 빚을 지고 죽기 전에 집필했던 유고시집 ‘스페인이여! 나에게서 이 잔을 거두어다오’도 이번 시선집에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됐다.

세사르 바예호 시선집 북토크에 참석한 송병선 울산대 교수(왼쪽)와 북칼럼니스트 정혜윤씨.
지난 27일 서울 마포구 다산북카페에서 열린 북토크 ‘세사르 바예호를 읽는 밤’에 참석한 송병선 울산대 교수는 “바예호는 언어적 유희에도 관심이 많았고 페루 원주민들이 갖는 특징들을 잘 활용했다”면서 “단순한 인종적 혼합이 아니라 문화적 혼혈이 어떻게 시에 구현되는지 잘 보여준다고”고 말했다. 함께 대화를 나눈 정혜윤 CBS PD는 바예호의 무한한 고통의 시에서 세월호 참사를 떠올렸다면서 “슬프고 기침하는 존재”인 인간을 “어쩌겠는가”라고 바예호의 시구를 인용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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