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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 소녀가 철학을… 사상가로서의 고야, 계몽주의 그늘 탐색하다

입력 : 2017-09-09 00:41:59 수정 : 2017-09-09 00:4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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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화 등 아카데미 작품 대신 / 사실적 묘사 그림·글 통해 / 화가 아닌 사상가 고야 추적 / 당시 유럽은 계몽주의 세상 / 그 이면에 판치는 폭력·광기들 / 수많은 판화·데생으로 기록
츠베탕 토도로프 지음/류재화 옮김/아모르문디/1만6000원
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츠베탕 토도로프 지음/류재화 옮김/아모르문디/1만6000원


스페인의 유명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는 다음과 같은 데생 한 점을 남겼다. ‘철학은 가난하고 헐벗은 채로 간다.’ 이것은 페트라르카의 시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데생을 보면 한 소녀가 있다. 차림새를 보아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아이다. 그런데 소녀는 옷을 제대로 입지 않고 있다. 옷도 그렇지만 신발도 신지 않았다. 그런 소녀의 오른손에는 펼쳐진 책 한 권이 있고, 왼손에도 책 한 권이 들려 있다. 아직 앳되고 순박해 보이는 소녀는 질문이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철학은 교육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에게서도 구현될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난 2월 타계한 문예이론가 츠베탕 토도로프는 “고야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괴테나 50년 후 등장한 도스토옙스키에게도 뒤지지 않는 심오한 사상가였다”고 말했다. 그는 신간 ‘고야, 계몽주의의 그늘에서’를 통해 고야를 화가가 아닌 사상가로 접근한다. 

유럽 전역에 계몽주의 사상이 전파된 시기 프란시스코 고야는 혼란 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증언했다. 사진은 고야가 그린 ‘철학은 가난하고 헐벗은 채로 간다’.
아모르문디 제공
책은 교과서를 통해 봤던 고야의 초상화, 종교화, 정물화, 투우 그림 등은 제쳐둔다. 고야가 왕실의 녹을 받는 궁정인이자 아카데미 일원으로 그렸던 작품들이다. 대신 방대한 데생과 판화, 글을 중심으로 사상가 고야의 행적을 좇는다.

고야는 1780∼1790년대 초상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는 프랑스혁명으로 유럽 전역에 계몽주의 사상이 전파된 시기다. 그러나 1808년부터 1813년까지 스페인을 점령했던 나폴레옹은 계몽주의를 통치수단으로 이용했다. 그 결과 프랑스 점령군과 스페인 민중의 극렬한 대치 속에 살인과 강간, 고문과 광기가 양 진영에서 끝없이 이어졌다. 계몽주의 사상을 지지하던 스페인의 진보주의자들은 심각한 모순에 빠졌다.

고야는 이러한 혼란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증언했다. 고야 역시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을 뿐 아니라, 당시 주요 지식인 가운데 하나로 이런 사상에 젖어 있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전파할 수 있었다.

1799년 출판한 판화집 ‘변덕들’은 계몽주의자로서 고야의 면모를 나타낸다. 판화에는 화가 스스로 ‘인간의 과오와 악덕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50번 작품 ‘친칠라’에는 눈을 가린 당나귀가 자물쇠로 귀를 닫고 눈을 가린 두 사람에게 죽을 떠먹이는 모습이 표현됐다. 두 사람의 몸을 감싼 문장은 이들이 귀족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나태와 미신에 빠져 직접 보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고, 눈 가린 당나귀로 표현된 무지로 배를 불리는 세태를 풍자한 것이다. 제목인 친칠라는 당시 인기 있던 유사한 내용의 연극 주인공의 이름이다.

고야는 계몽주의가 그늘 속에 모호하게 내버려 둔 모든 것을 집요하게 탐색했다. 1793년부터 1828년 죽음을 맞을 때까지 계속된 탐색을 통해 그는 의지와 이성만큼이나 인간의 삶을 조종하여 폭력과 광기에 이르게 하는 어두운 힘을 발견했다.

고야가 그린 ‘변덕들’, ‘전쟁의 참화들’ 등 수많은 판화와 데생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그늘, 폭력성, 광기를 꿰뚫어 보여준다. 순박한 민중이 언제든지 살인자로 변할 수 있고, 순결한 가치의 이름으로 잔혹한 범죄가 저질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진실, 정의, 이성, 자유 같은 그의 가치는 여전히 익숙하다. 하지만 그는 이 길 위에 어떤 덫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동시대인들보다 잘 알았다.”

책은 고야가 보여주는 것들이 우리 시대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계몽주의 사상은 학술적인 흥미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초석이기도 했다. 당대 사회의 수많은 것이, 특히 지금까지 이어져 온 우리 사회의 수많은 것들이 그 초석 위에 세워졌다. 따라서 이 사상을 잘 알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치, 우리가 살기를 희망하는 세계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고야의 작품은 지혜의 교훈을 담고 있고, 그 교훈은 오늘날의 우리를 향한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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