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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패싱’이란 말은 ‘짝퉁영어’ / 외국어·외래어 남용도 문제지만 / 잘못 사용하는 것은 더 큰 문제 / 이번 기회에 대대적으로 개선을 외국인이 한국에 처음 와서 놀라는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외국어를 많이 사용한다는 점은 첫손가락에 꼽을 만하다. 길거리 간판에서 일상 대화에 이르기까지 영어가 아주 많이 쓰인다. 심지어 티셔츠에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를 영어가 적혀 있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영어를 많이 쓰다 보니 심지어 북한에서 온 새터민도 그 뜻을 몰라 당황할 때가 적지 않다고 한다.

요즈음 신문이나 방송 같은 대중매체에서 ‘코리아 패싱’이라는 용어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2017년 대선 때 한 후보가 TV토론에서 언급해 유명해진 신조어다. 한 언론사가 주최한 19대 대선후보 TV 토론회에서 한 후보가 다른 후보에게 “코리아 패싱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라고 묻자 그 후보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용어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최근 북핵 문제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면서 ‘코리아 패싱’이라는 용어가 다시 자주 쓰인다. 굳이 영어로 표기하자면 ‘Korea passing’인 듯한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물론 그 뜻을 대충 짐작해 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문제인데도 당사국인 한국이 국제 외교무대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소외당하고 있는 현상을 가리키는 듯하다.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그러나 문제는 이 용어가 올바른 영어가 아니라는 데 있다. 말하자면 진짜 영어가 아니라 ‘짝퉁 영어’인 셈이다. ‘패스’라는 영어가 ‘지나가다’니 ‘통과시키다’니 하는 의미이기에 그렇게 유추해 낸 듯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외국 매체에서 이 용어를 찾아볼 수가 없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코리아 이그노어드 (Korea ignored)’나 ‘코리아 패스트 오버(Korea passed over)’ 정도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다른 분야도 아닌 외교 문제에서 이렇게 엉터리 영어가 널리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어 속담에 ‘어 다르고 아 다르다’는 말이 있지만 외교 용어에서처럼 이 말이 피부에 와 닿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외교 용어는 조금만 잘못 사용해도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외교 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그렇기에 외교 문서에서는 용어 하나하나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2008년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빚어진 사건은 좋은 예라고 할 만하다. 그해 7월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은 홋카이도 한·일정상 회담에서 “교과서에 독도(일본명 다케시마)를 (일본 영토로) 표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당시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일본 총리에게 한국의 대통령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고 답했다고 보도했다. 그러자 한국의 일부 주민들이 대통령의 이 발언을 문제 삼아 그를 매국노로 몰아세우는 상황이 벌어졌다.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며 2000명에 가까운 주민이 ‘국민 소송단’이라는 것을 구성해 대통령을 상대로 법원에 소송까지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소송에서는 패소했지만 그 사회적 파장이 적지 않았다.

문제의 발단은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마지막 두 문장이었다. 지금은 곤란하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면 일본이 원하는 대로 해줄 수도 있는 뉘앙스를 짙게 풍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요미우리신문에 있었다. 이 기사를 쓴 기자가 ‘자제해 달라(待ってほしい)’를 의미하는 영어 ‘hold back’을 ‘기다려 달라’로 잘못 번역한 것으로 밝혀졌다. 청와대는 사실이 아니라는 반박성명을 발표했고, 일본 정부도 공식성명에서 이 신문 기사가 오역임을 인정했다. 해당 신문사도 인터넷에서 즉각 이 기사를 삭제했다.

필요 이상으로 외국어나 외래어를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잘못 사용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우리 주위에는 알게 모르게 잘못 사용하는 외국어가 너무 많다. 가령 스킨십(터칭), 아이 쇼핑(윈도 쇼핑), 애프터 서비스(커스터머 서비스), 커리어 우먼(워킹 우먼), SNS(소셜미디어) 등 하나하나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다. 이번 기회에 잘못 사용하는 외국어를 고쳐가는 계기로 삼도록 하자.

김욱동 서강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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