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한국사의 안뜰] "왜군 물리치자!"… 간절함으로 탄생한 '전쟁의 기술'

입력 : 2017-07-29 16:30:00 수정 : 2017-07-29 22:47:03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52〉 왜군 격퇴하기 위해 만든 ‘무예제보’ 1598년 10월, 임진왜란 막바지에 조선에서는 ‘무예제보’(武藝諸譜)라는 무예서 한 권이 탄생했다. 이 시점은 일본군이 같은 해 11월 노량해전의 패전을 끝으로 조선에서 총퇴각하면서 전쟁이 끝나기 직전이었다. 이런 와중에 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여 여섯 가지 무예를 담은 병서가 나온 것이다.
‘무예제보’는 1598년 임진왜란이 끝날 즈음 조선에서 나온 무예서다. 이는 조선 최초로 단병무예를 정리한 병서로,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전쟁 중 만든 무예서다. 사진은 영화 ‘대립군’의 한 장면.
◆일본군의 창, 검술

임진왜란기 일본군 무기로 강력한 위세를 떨친 것은 조총이었다. 그런데 조총 못지않게 조선군을 위협한 무기가 더 있었으니 바로 창(槍)과 검이다. 일본군이 소지한 창과 검의 살상력은 16세기 전반 왜구를 통해 명에도 위력을 떨쳤다. 명군의 기록에는 왜구의 쌍검 솜씨가 매우 민첩해 사람은 보이지 않고 번쩍이는 검만 보이며, 창도 너무 빨라 날아가는 것조차 볼 수 없다고 했다.

조선은 1592년에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면서 일본군이 조총과 장검(長劍)을 잘한다고 전했다. ‘병학지남연의’라는 병서에서는 임진왜란기 일본군 전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쌍수도(雙手刀)는 왜구가 중국을 침범한 이후 처음 출연했는데, 왜구들이 이 칼을 번쩍거리면서 춤을 추며 전진해오면 병사들이 이미 기선을 제압당하고 만다.” 이 무렵 일본에서 창검술이 발달한 이유는 일본의 국내 사정과 연관이 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내란 시기인 전국시대가 경과한 직후였다. 사무라이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일반인도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창검술을 익혔다. 그러므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창검술은 실전력을 구비하였고 기술 면에서도 정점을 찍은 상태였다. 더구나 일본의 창과 칼은 조총과 결합하면서 더 강력해졌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전법은 가장 앞에 위치한 깃발부대가 양쪽으로 나뉘어 상대편을 포위하면 조총병이 일시에 총을 발사해 살상하고 전열을 무너뜨렸다. 이어서 창과 칼을 지닌 군사가 도망가는 병사들을 쫓아가 백병전을 맹렬히 전개했다. 이 전법으로 전쟁 초기 조선군이 일본군의 공격에 힘없이 무너졌다. 

◆나라의 운명이 걸린 병서 ‘기효신서’

임진왜란 초기 육상에서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한 조선군은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서 새로운 충격을 받는다. 원병으로 온 명군 중 남병(南兵)들이 구사한 전법 때문이었다. 남병은 절강, 복건 등 남쪽에서 온 군사들로 대부분 보병이었다. 이들은 척계광 장군이 개발한 전법으로 무장했다. 척계광은 왜구 피해가 극심한 남쪽지역에서 왜구 격퇴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기효신서’를 저술했다. 평양성 전투에서 조선인들을 놀라게 한 남병들의 전법은 먼 곳에서 화공(火攻)으로 일본군의 기선을 제압한 뒤 장창, 낭선(가지들을 남긴 대나무 끝에 쇠날을 부착한 병기), 당파(삼지창), 등패(등나무로 만든 둥근 방패) 등의 단병기(單兵器·접전 무기)를 든 병사들이 돌진해 공격했다. 생소한 무기로 싸우는 이 전법은 조선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선조는 평양성이 수복되자마자 명의 제독 이여송을 방문했다. 선조는 감사의 뜻을 전하면서 명군의 승리 요인을 물었다. 바로 몇 개월 전에 명 장수 조승훈이 이끈 부대가 평양성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패배한 상황과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이여송은 “이전에 온 북방 장수는 기병 오랑캐를 방어하는 전법을 익혔기 때문에 싸움이 불리했습니다. 지금 사용한 전법은 바로 척계광 장군의 ‘기효신서’로서 왜적을 방어하는 법이어서 승리한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선조가 ‘기효신서’를 보여 달라고 하자 이여송은 내놓지 않았다. 선조는 즉시 역관을 시켜 이 책을 비밀리에 입수하여 류성룡에게 건넸다. 이제 ‘기효신서’는 조선의 운명이 걸린 책이 되었다. 

◆전시 중 완성한 ‘무예제보’

선조는 1593년 10월, 의주로부터 환도하자마자 훈련도감을 창설했다. 이때 훈련도감군은 조총을 다루는 포수로만 구성되었다. 조총의 위력으로 ‘기효신서’에서 화기나 화포수를 가장 먼저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평양성 전투를 체험한 이덕형과 류성룡의 계속된 건의로 1594년 훈련도감에 장창, 낭선, 당파, 등패 등을 다루는 살수(殺手)도 배치했다. 하지만 살수 양성은 예상보다 쉽지 않았다. 처음 접하는 단병무예의 자세나 동작을 독학으로 습득하기 어려웠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또 명군 교련관에게 직접 훈련도 받았으나 교사마다 출신지에 따라 기예가 달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체계적인 군사 교련을 위해 단병무예의 원류인 ‘기효신서’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런데 ‘기효신서’의 독해는 빠르게 진행되지 못했다. 그 내용이 이제까지 조선에서는 접하지 못한 무기와 전법을 담고 있으며 방언(方言)도 많았다. 류성룡조차 이 책의 문장이나 용어, 무기 명칭이 난해하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선조는 1594년 봄, 살수들이 익힐 ‘살수제보’(殺手諸譜)를 훈련도감을 시켜 번역에 착수하게 했다. 실무는 낭청 한교(韓嶠)에게 맡겼다. 살수제보가 어떤 책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기효신서’의 살수보가 주축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이때도 번역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다가 1595년 5월 이후로 재개되었다. 한교는 번역을 위해 문헌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발로 뛰어다녔다. 모르거나 의심 나는 부분이 있으면 명군에게 직접 가서 물었다. 또 살수를 뽑아 명군 진영에 가서 시범 자세를 상세히 관찰했다. 명군 교사의 동작에서 의심 나거나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다시 찾아가 질문했다.

1598년 7월, 한교는 무예 자세를 최종 점검하기 위해 살수 12명을 선발해 허국위를 찾았다. 허국위는 여러 무예에 정통하고 ‘기효신서’를 잘 아는 명나라 장수였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드디어 1598년 10월에 ‘무예제보’가 완성되었다.

◆조선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다

‘무예제보’는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전쟁 중 만든 무예서다. 조선 최초로 단병무예를 정리한 병서로서 전쟁 중에 완성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 의미가 남다르다. 무엇보다도 궁시나 포(砲) 위주였던 조선군 전술을 혁신하겠다는 의지를 담아냈다. ‘무예제보’는 ‘기효신서’에서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장도의 여섯 가지 무예를 골라 해설과 그림, 한글 번역문을 붙였다. 이 무예들은 척계광 전법을 구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다. 등패, 낭선, 장창, 당파는 1대(隊)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이며, 곤봉은 창을 다루려면 반드시 익혀야 했다. 장도는 근접전에서 구비해야 할 기초 무기로 강조되었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무예제보’는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했으나 다른 책으로 탄생했다. 습법(譜)과 총도(總圖)라는 구성 때문이다. 습법은 무예를 익히는 법으로서 무예마다 그림이 붙어있고, 한자로 쓴 본문 내용을 다시 우리말로 풀이한 ‘니기보’를 두었다. 총도는 전체 동작의 순서를 정리한 도식이다. 습법과 총도는 ‘기효신서’에 없는 구성으로 ‘무예제보’에서 새롭게 시도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무예제보’는 ‘기효신서’를 조선식으로 재해석한 병서라 할 수 있다.

◆무명인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무예제보’의 간행에 큰 공헌을 한 한교는 한명회의 5세손으로 서얼 출신이다. 또 현재 이름도 알 수 없는 수많은 훈련도감 군들도 함께 참여했다. 그래서 ‘무예제보’는 무명의 사람들의 노고와 간절함이 담긴 병서다. 무예의 역사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조선을 강한 나라로 만들고자 한 사람들의 발자취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