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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비로소 인간을 보기 시작했다”

입력 : 2017-07-15 03:00:00 수정 : 2017-07-15 14: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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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와 21세기 전쟁의 극한 경험 오가며 ‘인간에 대한 이해 어떻게 바뀌었나’ 해부 / 중세 전쟁은 신의 계획… 인간 존재는 없어 / 18세기 인문주의가 전쟁 이해 방식 뒤집어 / 삶과 죽음·굶주림… 인간 경험적 가치 인정 / 최고의 건위는 신이 아닌 인간 의지 '각성' / 오늘날 "전쟁으로 뭘 얻는가" 독자에 숙제로
유발 하라리(지은이)/김희주(옮긴이)/옥당(북커스베르겐/2만3000원

극한의 경험/유발 하라리(지은이)/김희주(옮긴이)/옥당(북커스베르겐/2만3000원


전쟁이란 극한 경험을 통해 인류의 행로를 내다보는 책이다.

지난해와 올해 초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와 ‘호모데우스’를 펴낸 저자는 인간과 인류 주제의 역사 강의로 유명하다. ‘사피엔스’로 인류의 본질을 풀이했다면, ‘호모데우스’로 인류의 미래를 예측해보았다. 이번 국내에 소개된 ‘극한의 경험’은 전쟁이란 무제한 폭력을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보다 심화시켜본다.

저자는 15세기와 21세기를 왔다 갔다 하며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주요 논지는 1740년부터 1865년까지 전쟁을 이해하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불과 120여년 사이다.

중세 시대 선과 악, 옳음과 그름, 미와 추를 판단하는 주체는 신 또는 초자연적 존재였다. 신이 모든 권위와 의미의 원천이었고, 유한한 인간의 의견과 판단은 바람처럼 속절없는 것이었다. 인문주의 혁명 이전에는 거대한 우주 계획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믿었다. 중세부터 18세기 이전까지는 전쟁을 인간의 경험이나 체험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즉 전쟁은 신의 계획에 따른 행위였으며, 폭력 행위로 인식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저자는 인문주의 혁명 이전을 정신의 우위기(1450∼1740년)로 구분한다.

정신의 우위기에 전쟁 경험담은 주로 중간 계급이나 고위급 지휘관으로 복무한 귀족들이 썼다. 이들은 전쟁의 극한 경험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수많은 전투를 묘사하며 살인의 격정과 승리의 환희는 물론 죽음과 부상, 굶주림, 질병 등을 상세히 설명했다. 하지만 군인들의 비범한 감각과 감정을 얻거나 고양된 각성 상태에 도달했다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즉 정신적 느낌은 무시되었다. 종교인들은 명백히 종교적 측면에서 전쟁을 해석하고, 전쟁이라는 사건에서 신의 메시지를 읽어내려 했다. 이 시기 사람들은 성경과 논리를 통해서만 지식을 얻었고 경험적 가치는 인정하지 않았다.

‘극한의 경험’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전쟁은 인간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고, 인간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며, 세상에 대한 이해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유럽은 나폴레옹전쟁을 통해 중세에서 근대로 각종 무기가 진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왼쪽은 나폴레옹 군대가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하는, 오른쪽은 중세 시대 십자군들이 원정길을 떠나는 모습의 그림이다. 
위키피디아 제공
그러나 인문주의가 이를 뒤집었다. 거대한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 경험이라는 것이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를 지내는 동안 계몽주의와 감성 문화,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전쟁을 인간의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저자는 이를 육체의 반란기(1740∼1865년)로 정의한다.

저자는 ‘호모데우스(Homo Deus)’에서 이를 잘 설명했다. ‘무의미한 우주의 의미를 창조하라’가 인문주의가 인간에게 요구한 제1 명령이었다는 것. 인문주의 혁명을 거치며 인간은 절대적인 의미의 원천이 되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가 최고의 권위를 획득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느낌과 욕구를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장자크 루소는 이를 잘 표현했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 나 자신의 의견만 물으면 충분하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은 좋은 것이다. 내가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나쁜 것이다.” 다시 말해 지혜와 권위의 기준이 신과 이성에서 인간과 감정으로 옮겨온 것이다.

하라리가 중세를 통해 얻는 공식은 ‘지식 = 성경×논리’이다. 그리고 인문주의 혁명은 이 공식을 ‘지식 = 경험×감수성’으로 변화시켰다. 저자는 이런 변형이 전쟁에 대한 해석을 바꾸었다고 설명한다. 당시는 낭만주의가 풍미한 시대였다. 전쟁이란 평시에 몇십 년 동안 배워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전투 10분 만에 깨닫도록 할 정도로 극한 경험이다. 전쟁의 극한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깨달음을 절대 이해할 수 없다. 사실 인류 문명사에 이런 시각이 등장한 것은 채 300년이 되지 않는다.

근현대에 와서야 이 같은 인식의 변화는 군사 혁신으로 이어졌다. 전쟁 정치, 일반 사병의 지위, 군사 이론의 원리까지 바꿔놓았다. 군인들은 ‘극한의 경험’으로 현명해지기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경험’으로 트라우마를 겪고 무감각해지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전쟁 전과 전쟁 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

18세기 말 보어전쟁에서 귀환하는 영국 군인들을 그린 러디어드 키플링의 시 ‘귀향(The Return)’의 시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어디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평범한 아이로 떠났고, 생각하는 남자로 도착했다.”

21세기 인류는 전쟁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가. 21세기에도 전쟁은 필연적이다. 그러면 인류는 전쟁이란 엄청난 폭력 행위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가. 저자는 이에 대한 답을 아직 내놓지 않고 있다. 인류의 행로가 어떻게 전개될지 저자 스스로도 궁금해하고 있다. 현재 인류는 인공지능(AI)을 비롯한 엄청난 기술적 진보를 경험하고 있지만, 저자가 보는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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