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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한·미 회담의 숨은 主演,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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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7-04 22:44:27 수정 : 2017-07-04 22:4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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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으로 국민 동의 구해야 하나 / ‘관급통계’ 폐해 줄일 새 길 찾기를 어느 쪽에서 자살이 흔하게 발생하나. 영국인가 프랑스인가. 이를 두고 열띤 논쟁이 전개된 적이 있다. 19세기 초반이다. 포문을 연 이는 영국 지식인 조지 버로우스였다. 그는 1815년 ‘런던의학보고’에 게재한 글에서 “적어도 최근 몇 년 동안은 런던보다 파리에서 자살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빈번했다”면서 프랑스를 ‘자살국가’로 규정했다. 프랑스는 발칵 뒤집혔다. ‘프랑스 의학사전’의 자살 항목을 집필한 장 에티엔 도미니크 에스퀴롤이 선봉에 섰다. 그는 “영국인의 자살 성향이 강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고 맞받아쳤다. 자살이란 단어가 옛날부터 있었던 영국(적어도 1651년부터 있었다)과 달리 프랑스에선 18세기에야 생겼다는 반박도 했다.

이 공방은 왜 불붙었을까. 특정사회의 풍속과 도덕, 사회 구성원의 기질 등이 자살을 부추긴다는 당대 통념이 일차적 요인으로 작동했다. 그렇다면 ‘자살국가’로 몰리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일밖에. 양국 교양계층은 서로 “너희가 더 형편없다”고 손가락질하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다. 하지만 한결 더 결정적인, 숨은 요인도 존재한다. 정확한 통계다. 그것이 없어서 양국은 어설픈 수치에 엉뚱한 추론과 해석을 얹어 진흙탕싸움을 벌인 것이다. 분란을 부르는 것은 인간 탐욕만이 아니다. 통계도 분란을 부른다. 때론 ‘없는 통계’마저도.

어제 본지에 6·30 한·미 정상확대회담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둘러싸고 전개된 막후 공방을 다룬 기사가 실렸다. ‘트럼프 “FTA 피해” 압박→문 “효과조사” 역제안에 분위기 반전’이란 제목의 기사였다. 막후 드라마를 이렇게 거의 실시간으로 접하기는 쉽지 않다. 비공개가 관행이어서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전날 이례적 선택을 했다. “대북정책 지지를 얻고 경제분야를 내줬다”는 해석이 나도는 현실이 부담스러워서였을 것이다. 청와대는 전격 공개를 통해 “경제분야에서도 선방했다”고 역설하면서 여론의 강력한 지지를 호소한 셈이다.

어제 기사에서 눈길을 확 끈 것은 그러나 청와대의 협상 역량·여론 환기 노력만이 아니다. 정확한 통계의 중요성도 거듭 절감하게 됐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설명 과정에서 “정상 간 대화를 통해 서로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이 너무 많은 점이 확인됐다”고 밝혔다고 한다. 미국 백악관에 잘못 입력된 FTA 통계 정보가 통상압력으로 돌아오기까지 통상관료가 움직이지 않았다고 분통을 터뜨린 것이다. 하지만 이 진술은 회담 기류를 바꾼 숨은 주연(主演)이 통계였다는 점도 여실히 드러냈다. 우리 측이 통계 공방에서 버텨내지 못했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이 와튼스쿨 동문 정도가 아니라 서로 없으면 못 살 죽마고우였다고 해도 순조로운 마무리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통계는 때론 독이 되고 때론 약이 된다.

북한은 어제 탄도미사일을 쐈다. 청와대로선 떡 주고 뺨 맞은 기분일 것이다. 정신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정세 변화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통계의 중요성이다. 문재인정부 앞에는 평양 당국이나 백악관보다 더 중요한 상대가 있다. 5000만 국민이다. 그 어떤 국정철학과 청사진도 국민 동의와 지원이 없으면 뜬구름이 될 수밖에 없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그제 조언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링컨 대통령은 ‘국민 지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반대로 국민 여론이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했다”고. 그렇다면, 그 무엇으로 국민 동의를 구해야 하나. 정답은 언론 플레이가 아니다. 정확한 통계다. 국내 통계 관리를 대폭 강화해 그 혜택을 국민과 함께 나눠 써야 한다.

국내 통계는 종류를 불문하고 도무지 미덥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정부기관이 생산하는 공공통계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적 독소인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만 해도 지난해 말 178.9%, 153.6%로 기준에 따라 오락가락한다. 지니계수 발표치도 곧이곧대로 믿기가 어렵다. 통계 활용 측면의 왜곡 또한 못 말릴 정도로 심하다. 통계가 이렇게 어지러워서는 십리도 가기 전에 발병 나기 십상이다. 적폐 청산을 원한다면, 강 건너 불 보듯 해서는 안 된다.

어디로 가야 하나. 권력 입맛에 맞는 수치를 쏟아내는 ‘관급통계’의 폐해를 극복할 길부터 찾아야 한다. 청와대가 작심하면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수 전문가가 ‘국가 통계 시스템의 선진화’를 촉구하고 ‘통계 독립 강화’를 주문한다. 박성현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신문 기고에서 “통계 선진국들인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이 중앙통계기관을 독립기관으로 지정해 운영하는 것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통계국이 통계청으로 승격된 1990년 이후 지금까지 27년 동안 통계청장 자리에 앉은 15명 중 압도적 다수가 기획재정부 출신이다. 통계청에서조차 전문가가 소외되는 나라에서 어찌 정확한 통계 생산과 활용을 기대할 수 있겠나. 그래서 쓴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이런 목소리만 경청해도 갈 길이 보인다. 통계가 언제나 약이 되는 새 세상도 열릴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의 ‘자살’ 공방은 비록 촌극 수준의 입씨름이었지만 결코 시시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사회공동체 이해와 대처에 힘이 된 수많은 후속연구와 통찰로 이어졌다.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이 ‘우연을 길들이다’에서 “통계사회학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청와대의 6·30 회담 경험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궁금하다. 통계 문제는 안중에 두지 않고 통상부처나 들볶는 결과에 그친다면 여간 실망스럽지 않을 것이다.

이승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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