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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천년의 역사, 보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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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26 08:55:06 수정 : 2017-05-26 08:5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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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진 영화…원주 폐사지 여행
논밭 사이 덩그러니 선 진공대사탑비 삼층석탑…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 맞서기 위해 전략을 편 ‘흥법사지’
한때 마을 전체가 사찰일 정도로 융성… 고려왕사 지광국사의 업적 새긴 지광국사탑비 남은 ‘법천사
빼어난 경치, 오랜 역사에 걸맞은 다양한 석물, 웅장한 건물과 불상 등 일반적인 사찰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없다. 사찰이 없으니 당연히 승려도 없다. 여름이 다가오자 어른 무릎 높이까지 자란 개망초 등 잡풀들이 휑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이 풀마저 없는 겨울이면 휑한 풍경이 더했을 터인데, 그나마 들풀이 빈 자리를 메우고 있다. 건물 하나 없는 폐허와 같은 곳이다. 화려하고 멋들어진 곳을 돌아다니는 여행과 어울리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화려함을 걷어내면 그 이면에 1000년의 역사가 녹아 있다. 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어느 시 구절처럼 화려한 건물들이 없으니, 그나마 남아 있는 탑과 탑비 등 유적을 자세히 보게 된다. 그 안에서 찾는 옛 흔적과 미(美)는 다른 사찰을 돌아볼 때와 다른 감동으로 다가온다.
충주호를 빠져나온 남한강 물길은 강원 원주 흥원창 부근에서 섬강의 물줄기가 합해져 여주로 향한다. 고려시대 때부터 조창인 흥원창이 있다 보니 원주는 사람과 물산이 넘쳐났다.

충주호를 빠져나온 남한강 물길은 충주에서 달천 물길이 더해지고, 원주에서 섬강의 물줄기가 합해져 여주로 향한다. 이 중 강원 원주의 남한강 유역은 고려시대부터 흥원창이라는 굵직한 조창이 있어 사람과 물산이 넘쳐났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번성한 곳이다 보니 신라, 고려 때 원주를 기반으로 한 큰 절들이 자리를 잡았다. 천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채 이 절들은 한 줌의 재로 스러져 폐사지가 됐다. 하지만 당시의 흥망성쇠를 유추할 수 있는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흥법사지와 거돈사지, 법천사지다.

세 곳의 폐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고찰로, 고려 때는 왕의 스승이었던 왕사가 개성에서 내려와 머물 정도로 융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쟁을 거치며 훼손됐고 복원되질 않았다.
강원 원주 흥법사지는 주위에 민가와 논밭만 있어 절터로 보이지 않는다. 진공대사탑비와 삼층석탑이 서로 의지한 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흥법사지 석탑 너머로 보이는 산은 고려 태조인 왕건이 후백제의 왕 견훤에 맞서 산에 올라 진을 쳤다고 해 ‘건등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세 곳의 폐사지 중 가장 오래된 절로 추정되는 곳이 흥법사지다. 주위에 민가와 논밭만 있어 절터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진공대사탑비(보물 제463호)와 삼층석탑(보물 제464호)이 서로 의지한 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중 진공대사탑비는 비신은 없고, 거북이 또는 용머리 모양의 비석(碑石) 받침돌인 귀부와 비석의 머리 부분인 이수만 남아 있다. 
흥법사지 진공대사탑비는 비신은 없고, 거북이 또는 용머리 모양의 비석(碑石) 받침돌인 귀부와 비석의 머리 부분인 이수만 남아 있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잘생긴 용의 모습을 표현한 귀부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입체감이 느껴지는 네 마리 용이 새겨진 이수가 볼 만하다.
여의주를 물고 있는 잘생긴 용의 모습을 표현한 귀부와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입체감이 느껴지는 네 마리 용이 새겨진 이수가 제법 볼 만하다. 탑비에서 석탑을 보면 길 너머로 산이 보인다. 고려 태조인 왕건이 후백제의 왕 견훤에 맞서 산에 올라 진을 쳤다고 해 ‘건등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거돈사지 언덕 위쪽에 원공국사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삼층석탑과 좌대, 오른편으로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절의 풍광을 즐기기보다 고즈넉한 폐사지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거돈사지가 으뜸이다. 흥법사지는 발굴 전이라 허전하고, 법천사지는 한창 발굴 중이라 어수선하다. 폐사지 방문이 처음인 이들에게 안성맞춤인 고즈넉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거돈사지로 바로 가도 되지만, 가기 전 거돈사지 인근 옛 정산분교에 들르자. 폐교된 학교이지만, 운동장 한구석에 당간지주가 놓여 있다. 또 학교 뒤편으로 가면 거돈사지 전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폐교에서 나와 거돈사지에 이르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석축과 수령 1000년이 넘는 느티나무다. 석축 한 부분을 느티나무 뿌리가 파고들어 마치 돌을 움켜쥔 듯 보인다. ‘돌을 먹고사는 나무’라 불리는 이유다. 높이 4∼5m 석축 위에 지어진 사찰은 길에선 제 모습이 보이지 않고 계단에 올라서야 볼 수 있다. 
강원 원주 거돈사지에선 높이 4∼5m 석축과 수령 10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석축 한 부분을 느티나무 뿌리가 파고들어 마치 돌을 움켜쥔 듯 보인다. 이 느티나무는 ‘돌을 먹고사는 나무’라 불린다.
느티나무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삼층석탑과 금당 터가 보인다. 금당 터 가운데 불상의 좌대가 있다. 절 한가운데 자리 잡은 불상은 사라지고 이를 받치던 좌대만 남아 있다. 금당을 지나 언덕 위쪽에 원공국사탑이 있다.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거돈사지 전경이 한눈에 보인다.

다시 내려와 원공국사탑비로 향한다. 흥법사보다 100년 정도 후에 지어진 거돈사의 원공국사탑비 귀부는 흥법사지 탑비와는 생김새가 달라 거북이나 용머리로 보이지 않는다. 머리 양쪽 귀 뒤까지 물고기 지느러미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성에서 조각한 다른 탑비와 달리 거돈사지 탑비는 지역에서 귀부를 조각해 기술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반면 귀부에 새겨진 ‘만(卍)’ 표시는 흥법사지보다 더 뚜렷하다. 그만큼 불교의 힘이 강해졌다는 것을 말한다.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비는 귀부는 거북이나 용머리로 보이지 않는다. 머리 양쪽 귀 뒤까지 물고기 지느러미가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성에서 조각한 다른 탑비와 달리 거돈사지 탑비는 지역에서 귀부를 조각해 기술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반면 귀부에 새겨진 ‘만(卍)’ 표시는 흥법사지보다 더 뚜렷하다.

마지막 폐사지 법천사지는 절이 융성했을 당시 마을 전체가 사찰일 정도로 사세가 컸다고 한다. 그 규모가 경주의 황룡사지, 익산 미륵사지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지광국사탑비(국보 제59호)만이 법천사지에서 온전히 남아 있는 유일한 석물이다. 법천사에서 출가해 고려시대 왕사까지 오른 지광국사의 업적을 새긴 비석이다. 지광국사탑비에는 정교하고 화려한 문양이 새겨졌다.
법천사지는 절이 융성했을 당시 마을 전체가 사찰일 정도로 사세가 컸지만 지금은 지광국사탑비만이 남아 있다. 지광국사탑비 귀부는 멋진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다른 폐사지 귀부의 등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지만, 법천사지 귀부엔 ‘왕(王)’자가 새겨져 있다. 왕권이 강해지고, 불교가 안착한 시기에 지어진 절임을 알 수 있다.
귀부는 멋진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다른 폐사지 귀부의 등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지만, 법천사지 귀부엔 ‘왕(王)’자가 새겨져 있다. 지광국사가 왕에 버금가는 예우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왕권이 강해지고 불교가 안착한 시기에 지어진 절임을 알 수 있다. 또 이수는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배인 반야용선의 모양을 형상화해 폐사지 세 곳의 탑비 중 가장 안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지광국사탑비의 이수는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 주는 배인 반야용선의 모양을 형상화해 폐사지 세 곳의 탑비 중 가장 안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일반적인 사찰이라면 제대로 보지 않고 지나쳤을 석물들이다. 하지만 이렇다할 건물들이 없기에 빈터에 서 있는 탑비와 탑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들이 말하는 천년의 역사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원주=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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