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공약집에도 없는 약자들] 365일 미세먼지 마시는 사람들

입력 : 2017-05-19 19:16:41 수정 : 2017-05-19 21:22:29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길위에 방치된 취약 직업군… 고작 일회용 마스크로 버텨/환경미화원·집배원·공사장 노동자 등/일상적으로 고농도 미세먼지에 노출/제대로 된 보호장구도 지급 못받아/4월 분진 기준 법규 명시/싱가포르 옥외근로자 보호 기준 제정/개인별 건강상태까지 체크 대조 이뤄
그의 하루는 먼지에서 시작해 먼지로 끝난다. 1년 365일 미세먼지에 갇혀 20년을 일해 온 사람. 경기 김포 하성면의 환경미화원 한대일(46)씨다.

일과는 아침 7시 하성면사무소 앞 왕복 2차로 도로에서 시작된다. 서울 강서구 마곡지구 개발이 시작된 뒤로 덤프트럭이 쉴 새 없이 다니지만 이면도로여서 청소차량이 들어오지 않는다.

매일 쓸어 내는 도로인데도 비질을 할 때마다 뿌연 먼지구름이 황사처럼 피어오른다. 집진시설을 갖추지 않은 소규모 공장과 각종 공사 자재를 실어 나르는 대형 트럭, 불법 소각에서 뿜어져나온 것들이다. 미세먼지를 쓸어 담는 그의 유일한 보호장구는 ‘버프’라는 폴리에스터 마스크다. 등산이나 자전거 같은 야외 활동을 할 때 햇빛가리개용으로 나온 것으로, 3년 전부터 자비로 구입해 쓰고 있다. 미세먼지가 차단될 리가 없다.

한씨는 “미세먼지 마스크와 보호경을 마련해 달라고 수차례 시와 면에 요청했지만 늘 예산이 없다고 거절당했다”며 “평소엔 버프로 가리고 공기가 심하게 안 좋은 날만 약국에서 미세먼지 마스크를 (개인적으로) 사서 쓴다”고 말했다. 

낙엽이나 꽃가루, 마른 풀을 바람으로 한데 모으는 ‘블로어’ 작업을 할 때는 각종 먼지가 대책 없이 코와 입으로 들어온다. 농촌마을 특성상 인도가 없는 대로가 많아 차들이 지척에서 매연을 뿜으며 지나가도 피할 길이 없다. 그렇게 작업하는 큰길 구간만 6㎞가량 된다. 대기질과 상관없이 한씨의 작업환경은 늘 미세먼지 ‘나쁨’인 셈이다.

한씨와 동료 3명이 맡은 하성면 면적은 여의도 18배 가량(54.75㎢). 하루 8시간 동안 세상의 먼지를 쓸어담은 그의 코 주변이 시커멓다. 먼지로 범벅된 옷은 면사무소에서 매일 빨아 입지만 그렇게 된 지도 3∼4년밖에 안 됐다. 사비를 들여 중고 세탁기를 마련한 뒤부터다. 이전까지는 집에 옷을 들고 가 빨아야 했다.

한씨는 “환경미화원 중에는 잔기침을 달고 사는 이들이 많다”며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 마스크는 인권 문제인 것 같은데 이마저 투쟁하듯 받아내야 하는 현실이 씁쓸하다”고 토로했다.

전국집배노조 정창수 경인준비위원장이 17일 오토바이를 타고 파주 문산읍의 비포장도로를 지나고 있는 모습. 정씨의 이동거리는 매일 100㎞에 이른다.
파주 문산우체국 집배원인 정창수(52)씨의 상황도 비슷하다.

하루 평균 7∼8시간, 우편물이 많을 때는 9시간 동안 도로와 마을 비포장도로를 달린다. 오토바이로 매일 100㎞를 이동하고 나면 얼굴이 꺼끌꺼끌해지지만 한씨와 마찬가지로 개인 구매한 버프나 워머로 코와 입을 가리는 게 고작이다.

지난해 이맘때 언론에서 연일 미세먼지의 심각성을 지적하자 우체국에서 개인당 마스크 9장을 나눠준 적은 있다. 하지만 미세먼지 차단용이 아닌 일회용 마스크였고 올해는 이마저도 지급되지 않았다.

정씨는 “미세먼지가 심각하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꽤 된 것 같은데도 제대로 된 보호장구를 받아본 적이 없다”며 “우리도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경기도 화성 송산신도시 건설현장. 아파트 내부에서 콘크리트 돌출 부위를 기계로 다듬는 견출작업이 진행되자 먼지가 연기처럼(가운데) 새어 나오고 있다.
환경미화원과 집배원, 지하철이나 공사장 노동자, 톨게이트 직원, 지하주차장 안내요원 등은 대표적인 미세먼지 취약 직업군이다. 이들은 일상적으로 고농도 미세먼지에 노출돼 있으면서도 마땅한 보호장구를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에는 ‘작업환경을 측정해 근로자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시설·설비 개선, 건강진단 등 적절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고 돼 있지만 작업환경 측정 대상에 미세먼지가 포함되는지는 불분명하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현행법에 따르면 사업장에서 흡입 가능성이 있는 독성물질이 사용될 경우 미세먼지(PM10) 이하의 분진을 측정하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 PM10과 초미세먼지(PM2.5)를 감시하지는 않는다”고 전했다.
경찰이 마스크를 쓴채 경계 근무를 서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 같은 문제를 보완하고자 지난달 고용부는 작업환경 관리 대상인 분진에 PM10과 PM2.5를 명시하는 내용의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하지만 미세먼지 경보 발령 때 호흡용 보호구를 지급하라는 게 전부다.

문재인 대통령도 ‘3호 업무지시’로 미세먼지 대책을 내렸지만 취약 직업군 보호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양천구 은정초등학교에서 열린 미세먼지 바로알기 방문교실 수업을 참관한 뒤 손팻말을 든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외국은 어떨까. 싱가포르에서는 2013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산불로 연무가 도시를 뒤덮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싱가포르 노동부는 옥외 근로자 보호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만들었는데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다.

먼저 고용주는 평소 만성 심장·폐질환이 있거나 고령, 임신 근로자 정보를 확보한 다음 연무(PM2.5 기준)가 심할 때 줄일 수 있는 작업 기준을 세워둬야 한다.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작업이 무엇인지, 순환근무로 근무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지 평상시에 계획을 세워놓도록 한 것이다.

보안이나 폐기물 처리 같이 불가피한 작업을 하는 근로자에게는 상황에 따라 전면 방독면을 제공해야 하고, 마스크로 인해 불편함을 느낀다면 산소호흡기도 함께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근로자 임금 보전에 대한 내용도 있다. 작업 중단 조치가 단기에 끝나면 월급이나 연차 공제를 하지 않고 장기간 이어지면 노조와 상의해 임금 삭감이나 유연근무제를 적용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 같은 조치를 게을리한 사업주는 최대 50만싱가포르달러(4억여원)의 벌금이나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다.

환경정의 이경석 국장은 “우리도 ‘고농도일 때 마스크를 쓴다’ 수준이 아니라 노동자 개개인의 건강상태를 확인해 대응할 수 있는 명확한 지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무연탄광업, 호흡기질환 산재 절반 이상 차지

미세먼지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지정한 1급 발암물질이다. 인체에 유입된 미세먼지는 혈액을 통해 몸속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신체 모든 부위에 해롭지만 특히 호흡기에 치명적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정미 의원(정의당)에 따르면 최근 3년(2014∼2016년)간 호흡기질환 산업재해 신청은 4170건인데, 그중 2722건(65.3%)만 승인됐다.

승인건수 기준으로 산재 신청이 가장 많은 업종은 무연탄광업(1611건)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이어 석재 및 석공품 제조업(336건), 건축건설공사(168건), 암석채굴·채취업(92건), 금속광업(49건), 기타건설공사와 쇄석채취업(각 45건) 등의 순이다. 철도·궤도운수업 10건, 육상화물취급업 8건, 자동차제조업 5건도 있었다. 하지만 산재 통계로 잡히지 않는 피해 사례는 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

민주노총 전국건설노조의 김태범 경기중서부건설지부장은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상당수가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면 칼칼한 목을 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미세먼지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낮다”며 “미세먼지는 골절이나 화학물질 사고처럼 피해가 갑자기 드러나는 게 아니라 수십년 누적되고 나서 심각한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산재 신청을 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다”고 전했다.

글·사진=윤지로 기자 kornyap@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트리플에스 지우 '매력적인 눈빛'
  • (여자)이이들 미연 '순백의 여신'
  • 전소니 '따뜻한 미소'
  • 천우희 '매력적인 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