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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약집에도 없는 약자들] 만삭에 야근 수당도 안받고 일했는데… 퇴사 종용 ‘한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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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5-18 19:06:24 수정 : 2017-05-23 15: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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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단절에 내몰리는 비정규직 / 열심히 일해도 보상 못받아 좌절 / 계약만료 일방적 통보에 큰 상처 / 새 후임자 단기에 구하기 힘들자 / 출산예정일 넘겨 일해 달라 요구
“저는 출산 사흘 전까지 근무를 했어요. 만삭의 몸으로 야근도 빠지지 않았는데 회사는 퇴사를 종용했습니다.”

계약직 영양사로 근무했던 김나은(33·가명)씨는 출산·육아로 경력단절을 겪게 됐다. 출산이 사회적 편견을 확인하게 할 줄은 몰랐다. 이전까지는 ‘계약직이어도 열심히 일하면 보상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의 직장은 민간시설의 급식 식단을 관리해 주는 외주업체로 소속 영양사들과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했다.

서류 작업에 시달렸던 지난해 12월 사내 규정에 따라 임신부는 야근을 할 수 없었지만 김씨는 만삭의 몸으로 연일 야근을 했다. 오후 6시 출퇴근 입력기에 지문을 찍고는 회사에 남아 밤 11시까지 일을 했다. 상사는 사내 규정을 이유로 김씨를 야근자 명단에 올리지 않았다. 임신한 몸으로 밤늦게까지 일하면서 다른 동료들과 달리 수당을 받지 못한 것이다. 김씨는 “충성심을 보이면 회사에서 대체인력을 구하고 복직을 기다려주는 등 배려를 해줄 거라 생각해 참았다”고 말했다.

그는 사측에 “출산 이후 6개월만 아기를 돌보고 다시 나오고 싶다”고 밝혔다. 양가 부모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고작 6개월 된 아기를 남의 손에 맡기고 싶지 않았으나 경력단절의 두려움이 컸다. 경력단절 기간이 길었던 선배일수록 더 열악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경우를 자주 봤기 때문이다.

윗선에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김씨는 복직에 대한 희망을 갖고 직장 근처의 영아 어린이집을 알아봤다. 계약 종료 3일 전까지 회사에서는 재계약 여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계약 만료 이틀 전 관련 소식을 전한 사람은 사장이 아닌 동료 영양사였다. “김 선생님이랑 재계약 안 한다던데요.” 김씨는 정나미 떨어지게 하는 일방적 통보에 큰 상처를 받았다. 

회사 직원은 모두 비정규직이었다. 임신한 여직원은 출산 이후 회사를 떠났고 육아휴직을 요구했던 남자직원도 퇴사를 전제로 휴직했다. 다만 김씨가 이 회사의 일반 직원 중 근무기간이 가장 길었고 그만큼 맡고 있는 업무가 많아 ‘혹시나’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그간 쌓았던 업무 성과, 경험, 칭찬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뱃속에 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만두라고 했다”고 성토했다.

사측의 ‘갑질’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틀 만에 새 직원을 뽑기가 힘드니 재계약을 한 뒤에 퇴사하라는 것이다. 김씨를 대신할 적임자를 쉽게 구하지 못하자 “첫 애는 보통 출산예정일보다 늦게 나오지 않느냐”며 예정일을 넘어서까지 근무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김씨는 아기가 세상에 나오기 3일 전까지 일을 했다.

이 같은 경험은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깨닫게 해줬다. 아무리 열정을 보여도 의욕만으로는 ‘애 엄마’를 바라보는 사회의 편견을 극복하기가 어려웠다. 자신에게 많은 장점이 있어도 아기 엄마라는 타이틀이 이를 덮어버렸고, 회사는 비정규직 근로자를 편할 때 쓰고 버리는 부속품처럼 다뤘다. 이런 식으로 숱한 여성이 경력단절에 내몰린다.

여성가족부의 2016 경력단절여성 등의 경제활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만 25∼54세 여성 2명 중 1명(48.6%)이 경력단절을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주요 이유는 결혼, 임신·출산, 가족구성원 돌봄, 미취학 자녀 양육 때문이었다.

2015년 기준 연령대별 여성 고용률을 보면 25∼29세(68.6%)에서 가장 높았다가 30대에 50%대로 떨어졌고 40대에 다시 상승했다. 40대 고용률은 20대와 유사했지만 시간제 근로자가 늘어나는 등 일자리의 질이 나빠졌다. 경력단절 전 상용근로자였던 여성은 81.7%에서 단절 후 45.4%로 거의 반토막 났고 반대로 임시근로자는 10.4%에서 24.5%로 2배 이상 늘었다. 재취업하는 데는 평균 8.4년이 걸렸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비정규직 여성의 출산휴가를 계약기간에 포함하지 않고 자동 연장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러나 김씨의 사례처럼 출산을 앞둔 여성에게 퇴사를 권고하는 직장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계약기간을 조금 늘려주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새 정부는 ‘비정규직 제로화’ 공약을 내걸고 개혁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다만 공공부문만을 대상으로 삼아 민간의 비정규직이 ‘가까운 미래에 내게도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김씨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큰 기대는 안 해도 지난 정권 때보다 나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며 “저는 혜택을 못 받더라도 이런 시도를 통해 다음 세대에는 꼭 변화가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현미 기자 engin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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