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유경숙(사진)이 최근 펴낸 엽편(葉編)소설집 ‘베를린 지하철역의 백수광부’(푸른사상) 책머리에 적은 글이다. 200자 원고지 10~15장 분량의 짧은소설 61편을 모아놓은 이 소설집은 유려하고 고아한 문체만으로도 과연 가슴을 덥히는 힘을 지녔다. ‘유랑하는 자들’ ‘술의 시간’ ‘고요를 깨뜨리는 소소한 옛이야기’ ‘탱자나무집 계집애’ ‘증미산 사람들’ ‘별종들’ ‘천지자연이 나의 스승’ 등으로 장을 나누어 실어 나르는 이야기의 구체적인 속살은 풍미가 깊다.
자전적 이야기가 솔직하게 담긴 ‘탱나자무집 계집애’의 이야기들은 서럽고 애틋하다. 육남매 집안의 언니는 영등포까지 올라가 덜 자란 키를 속이고 겨우 나일론공장 시다(보조원)로 들어간다. 깊은 밤 아무도 없는 공장에 몰래 들어가 자투리 옷감으로 동생들의 속치마와 덧신 등 옷가지를 만들어 선물보따리를 들고 언니는 ‘섣달 그믐날’ 귀향 열차를 탔다. 빼곡한 사람들로 몸 하나 움직이기도 힘든 아수라장에서 보따리를 엉뚱한 역에 흘려버린 언니는 그때부터 내내 울어 눈물이 말라버렸고 동생은 언니의 빈손을 보고 울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검정 ‘구르마스’를 벗어놓고 수영을 하다 잃어버려 산을 타고 귀가하다 혼절했던 그녀를 어머니는 ‘독한 년’이라며 혀를 찼다.
‘증미산 사람들’의 갖가지 사연, 까치들의 악다구니를 외면하고 전신주 위 까치집들을 걷어내고 돌아오니 정작 자신의 집이 사라진 ‘작업반장 조씨’ 같은 별종들, 초조(初潮)를 시작한 여자 아이 치마를 바라보며 ‘꽃물’이 들었다며 얼굴이 발개진 ‘천지 자연’의 사제 이야기까지 이 소설집은 읽는 이들의 부유하는 머릿속 진애를 차분히 가라앉히는 힘을 발휘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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