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해 실제 판결 결과를 떠나 상당수 판사가 재판을 진행할 때 상급법원이나 행정부, 정치세력의 입장 등을 은연 중에 의식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판사 인사권을 대법원장과 법원장 등 소수가 독점하고 있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소속 법원장의 권한을 의식하는 편이냐’는 물음에 응답자의 91.8%가 “그렇다”고 답했다.
판사들이 의식하는 법원장의 권한은 근무평정권, 사무분담 결정권 및 사건 배당권, 해외연수자 선발 의견 개진권 등 순서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막강한 인사권을 바탕으로 ‘사법부 관료화’의 정점에 서 있는 ‘제왕적 대법원장’의 권한이 도마에 올랐다. 전날 ‘국제적 비교를 통한 법관인사제도의 모색 - 법관 독립 강화의 관점에서’를 주제로 연세대에서 열린 학술대회에서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한 김영훈 서울고법 판사(43·사법연수원 30기)는 “법원장에게는 평정권이 있어 법관들은 법원장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법원장 역시 대법원장의 대법관 임명제청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며 “결과적으로 법원장에게 위임된 권한도 대법원장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설문조사에서 대법원장의 권한을 축소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던 이유이다.
대법원장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행 대법관 제청 절차에 대해 응답자의 71.6%가 개선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 게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법관 다양화를 위해서라도 대법원장 관여 축소와 대법관 후보 추천·회의 절차 투명화 등을 골자로 한 민주적인 대법관 선출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법관들이 자체 설문조사를 통해 사법부의 구조적 문제점을 진단하고 개선 방안 마련을 공론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 부장판사는 “법관 상당수가 ‘법관 독립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만큼 대법원이 분명한 입장을 판사들에게 밝힐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장혜진 기자 jangh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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