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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밥 한 끼에 담긴 동북아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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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7-03-21 21:43:40 수정 : 2017-04-11 16:5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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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만찬에 초대하지 않았다”
국가적 경각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밥 한 끼는 천금(千金)이다. 적어도 중국 고대의 명장 한신이 등장하는 고사에 따르면 그렇다. 젊은 날 불우했던 한신은 눈칫밥을 먹던 시골 촌장 집에서 쫓겨난 뒤 강가에서 빨래하던 노파에게 밥을 얻어먹었다. 그 밥맛이 달고 또 달았던 모양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의 ‘회음후열전’은 훗날 빛나는 무훈에 힘입어 초왕에 오른 한신이 노파를 찾아 후히 대접하고 천금을 하사했다는 후일담을 전한다. 미담이다.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도 있다. 일반지은(一飯之恩) 혹은 일반천금(一飯千金)이다. 밥 한 끼의 작은 은혜에 천금으로 보답했다는 뜻이다.

밥 한 끼가 미담만 낳는 것은 아니다. 때론 국제 관계를 요동치게 하는 요물이 된다. 1964년의 로디온 말리놉스키 사건이 좋은 예다. 당시 구 소련 국방장관이던 말리놉스키는 중국 사절을 대접하던 자리에서 취중 실언을 했다. 소련이 니키타 흐루쇼프를 몰아낸 것처럼 중국도 마오쩌둥을 몰아내라고 종용한 것이다. 중·소 관계에 파국적 결과가 초래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마오쩌둥은 등을 돌렸고 양국의 불화는 60년대 말 중·소 무력분쟁, 70년대 미·중 핑퐁외교로 이어졌다. 지구촌 냉전 구도가 그렇게 뒤틀렸다. 밥 한 끼가 천재지변에 못지않게 파괴적 위력을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승현 편집인
웬 밥 한 끼 타령인가. 대한민국 외교안보 현안이 바로 밥 한 끼의 문제여서다. 15∼19일 한·중·일 3국을 순방하고 귀국한 렉스 틸러슨 미국 국무장관이 던진 한 토막 발언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틸러슨은 한국에선 유독 만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들(한국 정부)은 나를 만찬에 초대하지 않았다. (한국 방문) 막판에 가서 (만찬을 하지 않으면) 대중에게 좋지 않게 보일 것 같다는 생각에 ‘내가 피곤해 만찬을 하지 않았다’고 한 것 같다.”

어찌 봐야 하나. 우선, 미담과는 거리가 먼 불상사로 볼 수밖에 없다. 기본 성격은 다르지만 외려 말리놉스키 사건에 가까운 감마저 없지 않다. 우리 외교당국은 뒤숭숭하다. 틸러슨의 발언이 옳다면 면목이 없게 됐으니까. 세계 최강국의 외교 책임자를 상대로 밥 한 끼 같이 먹자는 얘기도 건네지 않았다는 뜻이 되니까. 틸러슨에게 만찬 무산의 책임을 돌리기까지 했다는 뜻도 되니까.

그러나 한국 외교당국이 그런 결례를 하고, 헛소리까지 덧붙였다고 믿기는 어렵다. 한·미 동맹 관계로 봐도 그렇고, 의전 상식으로 봐도 그렇고, 여러 정황으로 봐도 그렇다. 틸러슨이 뭔가 잘못 알고 있거나 잘못 설명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외교당국은 벙어리 냉가슴이다. 설혹 명쾌한 해명자료가 있어도 상처를 덧나게 하는 부작용이 클까 봐 그럴 것이다.

미국 국무부는 20일 브리핑에서 “일정 자체가 없었다”고 했다. “틸러슨 장관은 스태프들과 사적인 저녁을 먹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그가 피곤해서 저녁을 거절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고도 했다. 국무부 차원에서 틸러슨의 설명을 반복한 것이다. 틸러슨의 1박2일 방한 일정 중 공식만찬이 없었다는 것은 부동의 사실이고, 그것은 외교적 실책이란 점을 거듭 곱씹게 된다. 입맛이 이렇게 쓸 수가 없다.

밥 한 끼보다 더 큰 문제도 있다. 틸러슨이 공개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는 사실이다. 예삿일이 아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순방 중에 나온 그의 다른 발언도 심상치 않다. 그는 일본을 ‘가장 중요한 동맹국(Ally)’이라 했고, 한국을 ‘중요한 파트너(Partner)라고 했다. 양국을 차등 대우한 것이다. 전임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한·미 동맹을 린치핀(Linchpin·핵심축)으로 간주했던 것과는 천양지차다. 방중 때의 여러 언행도 뭔가 석연찮다. 일간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한 미국 주요 언론은 틸러슨의 이번 언행을 비판적으로 보도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어찌 생각할지는 또 다른 문제다. 만에 하나, 백악관의 주인마저 같은 생각이라면 한·미 동맹과 한국 안보의 앞날을 낙관할 길이 없게 된다.

종합적으로, 외교안보에 대한 경각심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국면인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이미 주한미군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를 겨냥해 무차별 보복 조치를 가하고 있다. 북한은 신형 고출력 로켓엔진을 단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로켓을 쏠 채비다. 동북아의 바다는 이미 거칠고 또 거친 것이다. 이런 판국에 가장 든든한 안보 버팀목인 미국마저 한국을 경시하거나 외면하는 쪽으로 선회하면 어찌 되겠나. 한국 입장을 도외시한 채 한반도 사안이 논의되고, 그 운명이 결정되는 이른바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의 우려도 날로 높아지는 상황이다. 혹시 틸러슨의 만찬 발언에 동북아 정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성찰하고 고민해야 한다.

이 긴박한 국면에 한국은 온통 대선 잔치판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도 여기에 있다. 대선 주자들은 김칫국 마시느라 바쁘다. 틸러슨의 발언 의미 따위가 안중에 있을 리 없다. 이렇게 한가하고 생뚱맞을 수가 없다. 국민을 안심하게 해주는 견실한 안보관을 바탕으로 동북아 정세를 주시하면서 경계의 끈을 조일 대선 주자와 정당이 얼마나 되는지 의문이다. 큰일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승현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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