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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생전에 영국 교육제도를 좌우하다 사후에 ‘희대의 사기꾼’으로 낙인찍힌 인물이 있다. 시릴 버트(1883∼1971)다. 연구 경력은 탁월했다. 그 업적으로 기사 작위를 받은 최초의 심리학자가 될 정도였다. 지능의 75%는 고정적이고 유전적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학자의 자녀는 학자가, 노숙인의 자녀는 노숙인이 된다는 논지였다.

영국 정부는 2차 세계대전 후 교육 개혁을 위해 최고위원회를 구성하고 고문으로 버트를 모셨다. 결국 ‘11+시험’을 채택했다. 11세 아동의 지능을 따져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할지 여부를 가른 것이다. 버트 어록은 이렇다. “1파인트의 용기에 1파인트 이상의 우유를 담는 것이 불가능하듯, 한 아이의 학업성적을 그 아이의 학습능력 이상으로 올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판이 추락한 것은 ‘11+시험’을 뒷받침한 버트의 일란성 쌍둥이 연구가 허위인 것으로 들통났기 때문이다.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는, 많게는 53쌍의 일란성 쌍둥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버트는 자기 소신에 맞춰 연구를 날조했던 것이다.

엉터리 과학과 저질 정치가 만나면 때로 대재앙이 빚어진다. 우생학이 전형적이다. 미국에선 단종법, 이민제한법을 낳았다. 나치 독일은 한 술 더 떴다. 2차 대전 직전까지 37여만명에게 불임수술을 강제했다. 유대인을 집단 학살한 홀로코스트도 같은 맥락이다. 버트 사례 또한 우생학적 발상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보여주는 모델 감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최근 TV연설에서 “터키 인구를 늘리는 것은 어머니의 책임”이라면서 자국 여성의 출산을 촉구했다. 눈길을 더하는 것은 학력과 연관되는 언급이다. 에르도안은 “고등교육을 받은 미래의 어머니라면 피임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성을 출산 도구로 간주한 것은 물론이고, 학력과 출산이란 두 별개의 변수를 한 묶음으로 엮기까지 한 것이다.

지난해 터키 인구는 7874만명으로 적지 않지만 출산율은 1980년의 절반 수준인 2.14명으로 떨어졌다. 인구는 곧 국력이다. 에르도안의 문제의식에는 이해할 측면이 있다. 저출산 현상에 시달리는 우리로선 더더욱. 하지만 왜 유독 고학력 여성이 아이를 많이 가져야 하는 것일까. 편견투성이의 불합리한 결론이다. 우생학의 악령이 어른거리는 감도 짙다.

에르도안은 지난해 타계한 싱가포르 국부 리콴유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리콴유 역시 1983년 국정연설에서 같은 주장을 펴 지식인 사회에서 비난깨나 샀으니까. 당시 싱가포르 정부가 지침을 받든답시고 온갖 웃기는 법제를 매만지다 세계적 파문을 더 키우기도 했으니까.

이승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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