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책방)은 한창훈이 그동안 써온 섬 사람들 이야기 중에선 가장 젊고 ‘순정한’ 버전의 소설이다. 열일곱살 무렵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또래의 섬 출신 아이들 다섯 명의 애틋한 추억을 담았다. 섬에서 태어나 같이 중학교까지 다녔지만 또래 중 수옥이란 아이는 어릴 때부터 10미터도 혼자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장애를 지녔다. 범실 길자 용철 같은 친구들은 수옥을 업고 다니며 늘 같이 놀았는데, 다리만 불편하달 뿐 예쁘고 팝송을 좋아하는 수옥만 홀로 섬에 남고 친구들은 육지 고등학교로 떠났다. 방학 때 우르르 고향에 온 아이들은 수옥을 둘러싸고 악동들의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며 이야기는 나아간다. 한창훈 특유의 전라도 사투리 입담이 이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구사되거니와 아이들의 입을 통해 발산되는 사투리는 더 감칠맛 난다.
이 소설은 영화를 염두에 둔 200자 원고지 550장짜리 경장편이다. 2003년 펴낸 연작 장편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에 40장 분량으로 짧게 붙였던 ‘저 먼 과거 속의 소녀’를 시나리오와 소설로 개작한 것인데 너무 짧게 쓴 것이 두고두고 아쉬워 다시 썼다고 한다. 한창훈은 “아무리 센 상상력도 현실은 못 따라간다”면서 “그 섬 구석에서 그렇게 멋진 짓을 했으리라고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실제 내가 경험했던 잊지 못할 기억”이라고 말했다. 영화는 EXO 도경수와 김수현을 주연으로 세워 24일 개봉한다.
“보기엔 영 춥구 딱혀두 그 나름으루 의뭉스럽게 살아가는 인생을 응달 너구리라 헌다는디, 내야 뭐 의뭉스러운 꾀래도 낼 재주나 있나유? 그저 벤소 깐에 세워 놓은 묵은 빗자루쥬, 뭐.”
이번 소설집에는 4대강 개발에 대한 농민들의 민심이 드러난 단편들이 많다. 작가의 거주공간이 여주이니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슈였던 셈인데 이를 두고 농민들끼리 나누는 대화는 서글프고 황량하다. “강을 막으면 그 물이 썩어…” “돈만 있음 죽은 이두 살려내는 시상여. 강 썩으믄 서울 가서 살면 되지… 머리에 띠 두르구 악쓴다구 생이 산댜? 요즘은 돈이 생명여.”
작가는 소설가 정아은과 나눈 책 말미 대담에서 “지금은 농촌소설이라는 장르도 근대 문화유산 정도로 취급받지만 아직도 300만명이 농사를 짓고 있다”면서 “자기가 속해 있는 계급에 대해 오히려 공격하고 스스로 자학하는 그런 모순을, 70년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농촌의 모습들과 그 안에 있는 전도된 의식들을 담아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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