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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의 ‘돈’ 이야기…탐욕의 역사]화폐경제 없어 약탈 유발한 조선

입력 : 2015-06-21 12:01:04 수정 : 2015-06-21 12: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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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군, 돈 내고 식량 매입 시도…조선인들 거절
분노한 명군의 약탈…“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 비난 유행

임진왜란 당시 명(明)나라는 제후국을 도울 겸 또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논리에 따라 전화가 자국까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군을 파견해 조선을 도왔다. 1592년말 이여송을 총대장으로 하는 5만여 명의 명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런데 나라를 망국의 위기에서 건져준 구원군임에도 조선에서 명군에 대한 평판은 매우 나빴다. 왜군과의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은 모습과 명군 지휘관들의 오만방자한 태도 등 때문이었다.

특히 명군 병사들이 조선 백성들을 약탈해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명군은 쌀, 콩 등 곡물은 물론 닭, 소, 돼지 등까지 뺏어가고, 심지어 아녀자들도 겁탈했다고 한다.

이들의 행패가 오죽 심했으면, 당시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란 유행어까지 돌았다. 촘촘한 참빗으로 긁어내는 것처럼 왜군보다 명군이 훨씬 더 심하게 수탈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슬픈 사실은 명군이 처음부터 약탈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심할 정도로 후진적인 조선의 경제시스템이 그들의 약탈을 유발했다.

◆은을 안 받는다고?

먼 곳까지 원정하는 병사들에게 군량을 충분히 보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천 리를 돌아 군량을 수송하면, 병사들의 얼굴에 굶주린 기운이 감돈다”는 오래된 격언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 대개 군왕들은 멀리 원정에 나설 경우 병사들에게 평소보다 훨씬 후한 급여를 지급하곤 했다. 그 돈으로 현지에서 식량을 사먹으라는 뜻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동을 돌아 직접 군량을 수송하자니 너무 멀고 비효율적이다. 전 국토가 왜군에 짓밟혀 세수가 끊긴 조선 조정에 충분한 군량 조달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명나라 조정은 병사들에게 급여를 풍족하게 줘 현지에서 식량을 구입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막상 식량을 사러 간 병사들은 황당한 꼴을 겪어야 했다.

병사들이 조선 백성들에게 은을 내밀자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을 받고 곡식이나 고기를 내줄 순 없다”며 모두가 고개를 흔든 것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일조편법 시행 후 은본위제가 확립된 상태였다. 명나라뿐 아니라 일본도 동전을 중심으로 한 화폐경제가 잘 형성돼 있었다. 유럽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화폐경제를 영위했다.

하지만 조선은 그 시기, 16세기말까지도 여전히 물물교환 경제였다. 쌀, 비단, 무명 등이 화폐 대신 쓰였으며, 관리들의 급여도 쌀로 지급했다. 물론 세금 역시 곡식이나 특산품으로 받았다.

조선 초기의 우수한 정치시스템을 가리켜 “조선이 매우 선진적인 사회”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화폐경제에 관한 한 조선은 거의 원시사회 수준이었다.

“돈을 내고 사겠다”는데도 거절당한 명군 병사들은 결국 분노를 터뜨린다. 화가 난 그들은 은을 주는 대신 무력을 앞세워 강제로 곡식과 고기 등을 빼앗았다.

쓴웃음이 비져나올 만큼 슬픈 광경이다.

◆17세기말에야 화폐경제 수립

일이 그렇게 되고 나서야 조선 조정은 화폐경제의 소중함을 깨달았지만, 전쟁 중에 화폐 발행이나 유통이 가능할 턱이 없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뒤 화폐 유통 논의가 나왔지만, 정묘호란 및 병자호란 등 때문에 불발로 끝났다.

간신히 화폐가 도입된 것은 17세기말 숙종조에 이르러서였다. 광해군 재위  시절 조선은 대동법을 시행, 진상을 특산품이 아니라 곡식으로 내게 했다. 덕분에 방납의 폐단이 대부분 개선됐지만, 나라와 왕실에 필요한 특산품을 따로 구입해야 하니 자연스럽게 화폐의 필요성이 강하게 대두됐다.

1678년, 숙종은 상평통보의 발행을 시작했다. 흔히 엽전으로 알려진 그 화폐다. 조정에서 상평통보로 물건을 구입하고, 관리들의 급여도 돈으로 주기 시작해 점점 화폐경제가 자리잡아간다. 물론 훗날 당백전이나 당오전 같은 폐단도 등장했지만 말이다.

화폐제도 확립은 곧 경제의 발달을 의미한다. 화폐 도입 후 조선의 상공업은 그 전보다 크게 발전한다. 일본이나 청나라와의 무역이 국가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였다.

때문에 “열강의 간섭 없이도 조선에서 자체적으로 자본주의가 탄생했을 것”이라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존재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회의론적인 시각이 더 많다.

겨우 자리를 잡았다고 하나 조선 후기의 화폐경제 수준은 유럽과 비교해 산업혁명 시대는 물론 르네상스 시대, 아니 고대 로마 시대만도 못했다. ‘암흑의 중세’라고 불리는 중세시대에도 네덜란드 등의 화폐경제는 조선과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세도정치 이후의 조선 위정자들은 너무나 무능하고 부패해 이들에게 제대로 된 경제정책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안재성 기자 seilen78@segye.com

<세계파이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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