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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연극 ‘허물’ “죽었어 엄마?”(아버지)

“어제 장례식 치렀어요. 기억이 안 나요?”(아들)

“그래서 교토 사는 누님이 오셨구나.”(아버지)

41살 스즈키 다쿠야의 삶은 한 달 사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80대 아버지는 치매다. 아내의 영정이 있는 거실에서 “엄마 어딨니?”라며 두리번거린다. 스테플러를 들고 손톱깎기라고 우긴다. 이것만 해도 답답한데, 최근 직장에서 징계면직까지 당했다. 바람을 피우다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낸 탓이다. 아내는 이혼 서류에 도장 찍으라고 난리다. 어머니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복장이 터질 듯하다. 정종으로 병나발을 불었다. 문득 깨어보니 아버지의 몸이 껍데기만 남아 있다. 아버지는 변태한 곤충처럼 허물을 벗고 60대 시절 몸과 기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연극 ‘허물’은 80대 아버지가 허물을 벗고 점점 젊어진다는 설정을 통해 한 남성의 삶의 궤적과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국립극단 제공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소극장판에서 공연 중인 연극 ‘허물’은 아버지가 허물을 벗는다는 기발한 발상에서 출발한다. 일본 작가 쓰쿠다 노리히코의 원작을 국립극단이 무대로 옮겼다. 연출은 류주연이 맡았다.

‘허물’은 기이한 설정을 통해 한 남성의 일생을 거꾸로 더듬는다. 육체는 쇠락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아버지는 하룻밤 사이 60대로 탈바꿈한다. 다음에는 40대, 그리고 30대로 여섯 번이나 허물을 벗는다. 변태가 거듭될수록 ‘늙은 아버지들의 껍데기’가 집안 곳곳에 쌓인다. 실패한 인생에 좌절하던 아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기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에게 서운했던 일이 떠오른다. 놀기 좋아하고 철없는 ‘젊은 아버지’가 야속해진다.

이 작품은 인생과 시간의 흐름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삶은 두 번 살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아버지의 삶의 궤적은 이 절대 진리를 넌지시 전한다. 극 후반부 20대∼80대까지 ‘아버지의 허물들’이 한 상에 둘러앉은 상상 속 장면은 나이듦이 무엇인지 눈앞에 펼쳐보인다. 아버지들은 “언제부터 내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거지?”, “믿을 수가 없어. 내 미래가 당신들이라는 게”라며 아웅다웅한다. 그러나 시간은 운명적 사랑에 설레던 청년을 경박하고 고집 센 중년 남성으로 바꿔놓았다. 아버지의 과거와 만나는 일은 아들의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 사랑과 실패, 태생적 기질들을 보며 자연히 내가 어디서 왔는지 돌아보게 된다. 실업과 이혼 위기에 좌절한 아들은 아버지의 인생을 보며 변화의 동력을 얻는다.

어이없는 사건이 잇따르다 보니 극의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떠들썩하다. 무엇보다 언제 치매를 앓았냐는 듯 젊어진 아버지는 극 전반에 따뜻한 위로와 힘, 웃음을 준다. 실패를 거듭해온 아들에게 이보다 더 힘이 나는 일이 있을까. 부쩍 늘어난 부모의 주름에 마음 아픈 자식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부모 세대의 젊은 날을 추억하다 보니 복고적 분위기와 아련한 향수도 깔려 있다. 연극은 아버지의 입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부터 고도 성장기, 거품 경제에 이르기까지 전후 일본을 되돌아본다. 일본 연극 특유의 연기톤과 어투가 덜한 점도 높이 살 만하다. 일본에서 건너온 일부 연극이 이질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이 작품은 과장되지 않은 사실적 연기와 연출로 공감대를 높인다. 등장인물들이 부르는 노래를 우리에게 익숙한 곡들로 바꿨다면 더 거리감을 좁힐 수 있었을 듯하다.

서사를 이끄는 추동력이 약한 점은 아쉽다. 결정적 사건이나 절정부가 없다 보니 2시간 넘는 상연 시간이 조금 길게 느껴진다. 극 중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2차 대전을 ‘추억’으로만 소비하고 침략전쟁에 대한 인식이 없는 점은 한국 관객으로서 불편한 대목이다. 1만∼3만원. 1688-5966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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