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포토에세이] 맞춤복 100년 가업…자∼ 오늘도 한벌 만들어볼까

관련이슈 포토에세이

입력 : 2015-02-24 21:55:57 수정 : 2015-02-24 22:08:10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이경주 대표가 다양한 원단 중 고객에게 가장 적합한 원단을 선택하고 있다. 그는 1916년 부터 시작한 ‘종로 양복점’을 3대째 이어가고 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죠? 그 인연을 만들기 위해 5000개가 넘는 바늘땀과 80시간 이상의 정성을 쏟아붓습니다. 그래서 그런 표현이 생긴 거 같아요.”

창업 100주년을 맞은 ‘종로양복점’ 테일러 이경주(66) 대표의 첫 마디다.

이 대표가 고객의 체형 특성을 고려해 신체치수를 측정하고 있다.
가봉을 마친 뒤 밝은 표정을 짓는 이 대표.
3대째 맥을 이어오고 있는 종로양복점은 1916년 이 대표의 할아버지 이두용씨가 종로1가 보신각 근처에 문을 연 게 시작이었다. 아버지 이해주씨에 이어 지금은 중구 저동에서 명맥을 지켜 나가고 있다.

종로양복점 창업주 이두용씨, 2대 이해주씨의 사진이 걸려 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인 종로양복점은 한때 공장 직원만 100명이 넘을 정도로 호시절을 누렸다. 하지만 1980년대 중·후반부터 맞춤 옷 대신 기성복을 즐겨입는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고, 지금은 단골손님을 제외하곤 양복점을 찾는 이가 거의 없다고 한다. 종로1가에서 동대문까지 수십 군데에 이르던 대로변 양복점들은 지하로, 빌딩 안으로 숨어 버렸다. 천하의 종로양복점이 중구의 한 빌딩 6층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기도 하다. 

가봉(시침질)을 하고 있는 이 대표의 손길이 섬세하다.
이 대표는 1969년부터 양복 재단일을 익히기 시작했다. 청계 5가에 있는 복장학원에서 재단용 자를 보는 방법부터 배우기 시작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아버지에게 혹독하게 가르침을 받았다. 처음엔 양복을 맞춘 손님들 열 명 중 서너 명이 사이즈가 안 맞는다며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등줄기에 땀이 맺힌다는 이 대표는 반세기 시간이 흐른 지금은 손님의 몸만 봐도 치수가 보인다고 한다.

이경주 대표가 종로양복점 창업 연도가 적힌 로고를 붙이고 있다.
호황을 누렸던 시절에 비해 지금은 제대로 된 간판조차 없는 7평 남짓한 양복점이지만 3대가 변함없이 지켜온 맞춤 양복에 대한 고집 덕분일까? 종로양복점은 최근 국립민속박물관이 발간한 ‘근현대 직업인 생애사’와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옷본을 뜬후 50년 된 가위로 능숙하게 재단을 하고 있다.
“맞춤복은 주인이 따로 없는 기성복과 달리 만드는 사람의 정성과 옷을 입는 사람에 대한 배려로 만들어집니다. 손님이 흐뭇해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마음이 바빠지죠. 그래서 전 오늘도 50년 된 재단 가위를 놓지 못합니다.”

두 자녀를 둔 이 대표가 한쪽 벽에 걸린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입지가 좁아진 맞춤양복 시장 탓에 아직 가업을 물려주지 못했네요….”

원단 장식장 한편에 할아버지 때부터 쓰이던 줄자 (사진①), 옷걸이 (②), 무쇠다리미 (③), 다리미판 (④)이 놓여 있다.
그를 마지막으로 종로양복점은 없어질지 모른다. 3대가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종로양복점이 이렇게 추억 속으로 사라지는가.

사진·글=이재문 기자 moon@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
  • 최지우 '여신 미소'